뜨거움을 떠나보낸 그대에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최지은 문과대 철학과 4


  다시 찾게 되는 영화가 있다. 지난번에 봤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꼭 끼어있는 영화가 그렇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다시 찾은 영화다. 낭만적이면서도 잔인하기만 했던 그 영화가, 친근하면서도 잔잔한 영화가 되어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사람이 변하면, 영화도 변한다.

  영화의 시작은 츠네오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유모차를 타고 외출을 나온 조제를 만나게 된다. 조제는 다리가 불편하지만 당돌하다. 할머니 외의 사람과는 거의 접촉할 일이 없는 그녀는 츠네오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책에서 얻은 지식을   자랑하며 빈정거리는 조제가 왠지 귀엽다. 그는 밥이 맛있다며 자꾸만 조제의 집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녀를 집안에 꼭꼭 감추고 살아온 조제의 할머니가 츠네오를 막아선다. 조제의 장애는 츠네오가 감당할 수 있는게 아니라며. 그런데도 츠네오는 계속 조제가 신경 쓰인다. 그러던 어느 날, 츠네오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곧바로 조제에게 달려간다.

  츠네오는 조제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1년 후-라는 자막으로 처리한다. 이제 직장인이 된 츠네오는 고향집에 내려가는 김에 조제를 부모님께 소개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진다. 남동생은 진짜 장애인 애인을 부모님께 데려갈 거냐며 형을 걱정 해대고, 오랜만에 길에서 마주친 카나에는 사회복지사가 된다더니 길거리 나레이터모델이 되어있다. 그래도 예정대로 여행길에 오르는데, 멋대로 구는 조제가 이따금씩 성가시게 느껴진다. 조제의 행동은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츠네오는 지쳐간다. 그 후 몇 달을 더 함께 살다 그는 조제의 곁을 떠난다.

  이렇게 츠네오의 행방만을 따라서 영화를 보다보면 그의 마음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달아오르고 식는 것, 만남과 헤어짐의 감정을 2시간 안에 모두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 <여자가 장애가 있었는데, 남자랑 살다가 남자가 떠났어.> 이렇게 무미건조한 한 줄짜리 줄거리로 츠네오의 연애를 요약해버리면 우리는 참으로 할 말이 많다. 여자가 장애가 있으니깐 그럴만하다든가, 남자가 개자식이라든가, 내 그럴 줄 알았다든가. 그렇게 남이 한 연애를 가십성으로 소모해버리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끝나는 순간 빛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가십으로 읽어내는 것은 우리의 시선에 장애가 있기 때문이지, 조제와 츠네오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과 사연이 있는 법이다.

  이 영화가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딱 잘라서 멜로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분류되는 멜로물은 만남을 소재로 한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이 이루어지느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이루어지는 순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작은 이별을 추억하는 츠네오의 독백이다. 게다가 만나서 좋은 꼴 좀 보려고 하면 1년 후로 넘어간다. 영화는 만남보다는 ‘변화’에 집중한다. ‘만남과 헤어짐’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츠네오는 조제의 집을 나오는 길에 차오르는 눈물을 쏟아낸다. 그토록 끌리고 좋아서 만난 조제와의 관계도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결국, 끝났다.

  사실, 사랑을 해본 사람에게 츠네오의 모습은 너무도 친숙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한번 이상의 사랑을 한다. 요즘은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된 인생의 틀에 맞춰 사느라 어딘가에 뜨거워질 틈조차 사라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뜨거워진 사람에게 장애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츠네오 역시 그렇다. ‘밥이 맛있어서’ 조제를 찾아가고, ‘자꾸만 생각나서’ 또 찾아간다. 혼자 둘 수 없어서 조제의 곁으로 가야겠다는 그의 말 역시 카나에에게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카나에의 말대로 그건 츠네오가 착한 애라서가 아니다. 그저, 카나에가 아닌 조제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기심과 끌림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조제를 만나기전 츠네오의 곁에도 누군가 있었고, 조제를 떠나오는 그의 곁에도 카나에가 있듯 감정은 달아오르고 식는다. 동시에, 만남과 헤어짐도 반복된다. 누군가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듯 누군가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 모든 사랑이 특별했듯 조제 역시 그 사이 어딘가쯤 위치한 특별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헤어지는 장면에서 조제가 울면서 츠네오에게 매달리기라도 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조제를 억지로 떼어내든 이미 떠나버린 마음을 붙잡고 얼마간을 더 버티든 츠네오는 그야말로 천하의 나쁜놈이 된다. 그리고 조제 역시 츠네오에게 ‘떠올리면 괴로운 한 때의 사람’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가 마지막까지 그들의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는 힘은 바로 ‘조제가 하는 사랑의 방식’에 있다.

  그녀는 사랑 앞에 당당하다. 몸에 흉터라도 하나 있으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온갖 부끄럼을 떨어대는 순정만화 속 여주인공과는 달리, 조제는 츠네오와의 첫 키스 후에 “해도 좋아”라며 옷을 벗는다. 사랑의 라이벌 앞에서도 멋지다. 츠네오를 빼앗긴 카나에가 유모차에 앉아있는 조제에게 직접 고개 숙여 뺨을 들이대게끔 만든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도 끝나간다. 결혼을 염두에 둔 여행이 아니겠냐는 친구의 말에 조제는 그럴 리가 있겠냐며 고개를 돌린 채 담배만 피워댄다. 조제는 이미 끝을 예감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츠네오의 눈치를 보거나 작아지지 않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별여행이 되어버린 상견례여행에서, 그녀는 휠체어를 사자는 츠네오의 말을 뒤로 한채 그의 등에 꼭 붙어 다닌다. 몇 달이 지나고, 츠네오는 떠나간다. 그러나 조제는 울며불며 매달리지 않고, 그를 떠나보낸다. 혼자 남을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조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달 후, 일년 후』를 소중히 여긴다. 그녀의 이름 역시 책 속의 ‘조제’라는 여자에게서 따 온 것이다. 또 다른 ‘조제’는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는 여자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한 때 그녀와 사랑했던 남자가 이미 끝난 사랑과 끝나버릴 사랑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러자, ‘조제’가 대답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누군가의 관계를 제대로 맺어본 적이 없는 조제는 ‘조제’에게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짧음과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사랑에 있어 진짜 장애는 물리적 장애가 아니다. 비록 조제의 장애가 츠네오를 지쳐가게 만들었을지언정, 그 관계의 끝을 말하는 데 있어 그것은 구차한 변명이 될 뿐이다. 그래서 츠네오는 무엇 때문이라며 탓하지 않고 그저 ‘도망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제가 그를 떠나보내는 것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의 시작이 있듯 끝은 온다. 상대를 미워하고, 화를 내고, 눈치를 보고, 모른 체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겪어보지 않은 것을 조제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제는 태어났을 때부터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 그것을 감추려 하거나, 외면하려 했다면 츠네오와의 사랑에서도 당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외부적인 장애를 겪게 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처음으로 어떠한 벽에 부딪히게 되면 어쩔 줄을 모른다. 한 번의 연애, 누구 또는 무엇과의 긴밀한 관계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건 안하겠다는 둥, 없이는 못살겠다는 둥, 죽겠다는 둥의 말을 내뱉는다. 밥도 굶어보고, 떼도 써보고,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기도도 해본다. 그래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잘 굴러간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나는 변했고, 변화는 또 찾아온다는 것을.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고안해보고, 세상을 보는 눈도 바뀌고, 그러다보면 예전에 봤던 영화도 예전 같지 않다.

  영화가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 그것이 성숙해져 가는 것이든, 늙어가는 것이든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마음이 끌리는 것에 단 한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다면, 그 끝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조제는 평소와 같이 생선을 굽는다. 단, 한 점이다. 쿵-하고 무릎으로 내려앉는 소리도 그대로이다. 뜨거웠던 사랑과 담백했던 이별 속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동 휠체어를 샀다는 것이다. 혼자가 된 조제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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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자 최지은 인터뷰

“뜨거움이 무엇인지 배웠어요”

 

 

- 이 영화로 비평문을 쓰게 된 이유가 뭐였나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다시 보고 난 후 꼭 한번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평론이 낭만적인 청춘, 장애가 있는 자의 사랑, 쿨한 연애라는 말로 이 영화를 다루고 있어서 제가 느낀 점을 글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저는 조제에게 감정을 몰입하고 영화를 봤습니다. 그러고 나니 낭만, 장애, 쿨 같은 말만으로는 그들의 연애를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평이라는 형식으로 말하기엔 꽤나 감상적인 영화여서 비평문에 맞는 글인지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우리가 영화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또한 비평의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뜨거움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연애를 할 때 뜨겁게 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연애를 하고 있는 분들에게 뜨겁게 연애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꼭 연애만을 두고 쓴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께선 종종 그러시지요. 젊을 때는 실패해도 된다고. 저 역시 그렇게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끌리는 것에 단 한 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다면, 그 끝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이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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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문화 심사평

비평의 미덕인 지성과 감성을 결합시키다

문과대 사회학과 주은우 교수

  예심을 거쳐 올라온 4편의 영상문화비평문들 가운데 「뜨거움을 떠나보낸 그대에게」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대상으로 한 이 글은 영화의 내용과 비평자의 체험이 서로 잘 융합되어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극중인물들과 함께 가며 인식의 성장을 이루도록 이끈다. 물론 멜로영화에 대한 정의라든지, 주제상 인상비평으로 흐를 가능성 등 위험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성과 감성이 비교적 잘 결합되어 영상문화비평의 미덕을 실현하고 있으며 나아가 ‘구제비평’의 가능성마저 살짝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심사자를 고민케 한 글은 「임상수의 <하녀>를 옹호하며」이다. 이 글은 지젝이 발전시키고 있는 라캉주의 정신분석학에 의거하여 ‘행위’의 정치학을 <하녀>에서 찾아내고자 하는데, 영화가 이론적 목적에 일방적으로 종속되고만 있는 것 같아 아쉬우며, 이왕 비평의 전략을 이렇게 잡았다면 논쟁의 구도를 보다 명확하게 잡아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덧붙는다.

  장훈 감독의 <의형제>를 대상으로 한 「추방된 자, 남겨진 자의 허구적 연대」는 논의의 전개가 다소 혼란스러우며, 이 영화가 과연 애초부터 남과 북의 연대를 추구했던가 하는 점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한다.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을 논하는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보고」는 영화비평이라기보다는 사회비평에 가깝다. 20세기는 영화의 시대였지만 21세기 현재 영상문화는 구성이 훨씬 복잡다양하며 그 폭은 사회 전반을 포괄한다. 그래서 본심 대상들이 한결같이 영화비평뿐이었다는 점은 심사자에게 또 다른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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