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하느라 연재가 늦어지고 있다”,  “OO하느라 시험공부를 못했다” OO에 들어갈 말은? 바로 문명5! 천재 게임개발자 시드마이어의 신작 문명5의 열기가 대한민국도 뒤덮었다. 온라인상에선 지금 G20 정상회의보다 간디를 피해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인기 게임 문명5 체험과 게임의 몰입 기제, 득과 실 조사를 통해 2010년 대한민국의 게임판도를 알아봤다.

 

 

사건의 발단은 2010년 10월 중순.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두고 일어났다. 사건이 시작 된 그 날, 기자는 제출 기한을 하루 남겨둔 리포트를 작성하던 도중 머리를 식힐 겸 중앙인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기자는 여느 때와 같이 게시물을 읽으며 여유롭게 눈으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멈칫, 다섯개의 게시물이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문명ㅠㅠ’, ‘문명…미치겠네요’, ‘진심 문명할 뻔 했어요’등 클릭 안하고는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제목이 연달아 게재돼 있었다. 글에 달린 덧글 수도 많았다. 그 게시물을 클릭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가 아는 문명이라고는 유명 언어강사 문명, 고교시절 배웠던 기억조차 희미해진 메소포타미아 문명 뿐이었다.


3분 뒤, 상황 파악 완료. 알고 보니 문명은 게임 이름이었다. 문명의 중독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게임 시작을 만류하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청개구리 본능이라고 했던가. 기자 역시 곧바로 문명을 시작했다. 기자가 태어나서 해본 게임이라고는 그 이름도 아련한 프린세스메이커와 퀴즈퀴즈가 전부다. 기자는 스스로 게임에 중독될 수 없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고 믿으며 20년을 살아왔다.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지’라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문명을 다운받았다. 이때만 해도 몰랐다. 문명이 암흑의 세계로 가는 이정표라는 것을.


의자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댄 채 문명을 실행시키자 오프닝 영상에 간디가 등장했다. 짤막한 오프닝 영상이 끝난 후, 기자의 몸은 의자 등받이에서 멀찍이 떨어져 모니터를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죽은 간디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 게임의 문외한이었던 기자에게 문명5의 그래픽은 신세계였다. 오프닝만으로도 큰 충격을 경험한 기자의 심장박동수가 빨라졌다.


본격적인 문명5 시작에 앞서 게임 세팅을 해야 했다. 본인의 취향에 맞게 국가와 맵(map,지도) 타입, 맵 크기, 난이도, 게임의 진행 스피드를 선택할 수 있다. 세팅에 따라 게임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이 필요했다. 기자는 지구 맵(지구 지형과 똑같은 맵)과 18개의 국가 중 조지 워싱턴이 지도자로 있는 미국의 고대시대를 선택했다. 시계를 보니 a.m.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정확히 한 시간의 문명5 체험 후 리포트를 쓸 계획이었다. 낮에 커피를 마셔 과제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터였다.


문명은 제목 그대로 선택한 국가의 문명을 키워나가는 게임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문명과 외교, 무역, 전쟁 등을 통하여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기자의 문명은 미국의 도시 워싱턴을 시작으로 했다. 턴(Turn, 차례)을 따라 국가를 발전시켰다. 문명5는 턴제로 내가 한 턴을 하고 컴퓨터가 한 턴을 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턴은 문명의 시계다. 턴이 돌아갈수록 고대시대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시간이 흘러간다. 누구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혹은 미래로 가는 상상을 해보지 않았는가. 그 꿈을 가상으로나마 이루어 줄 수 있는 게임을 만난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힌 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명의 승리 조건은 세계정복. 성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국방력 강화에 돌입했다. 그 무렵 동맹 요청이 들어왔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2세였다. 보아하니 알렉산더는 몸과 얼굴이 바람직한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동맹 수락! 기자는 상황에 따라 대통령, 국방부 장관, 문화부 장관 혹은 외교관이 되기도 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 게임에서라도 실컷 이뤄야지.’ 기자는 대리만족을 느끼며 문명에 빠져들고 있었다. 독일 문명 점령으로 세계 정복의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끼우고 시계를 보니 a.m.2:30. 독일을 너무 쉽게 정복해서인지 기분이 영 찜찜했다. 계획보다 한 시간이 오버됐지만 기자는 문명 하나를 더 정복하기로 했다.


두 번째 정복 대상은 그리스, 너로 정했다! 잘생긴 남자 얼굴은 3년이면 끝이라더니, 문명에서의 잘생긴 남자 얼굴은 30턴을 못 가는구나. 잘생긴 알렉산더 2세에게 미안했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것. 배신이 불가피했다. 기자의 문명 병력은 이미 20.1인치 모니터 속 세계 최고였다. 아가멤논과 오디세우스가 왔어도 이기지 못했을 역사적 전쟁의 승리 후 시계를 보니…이럴 수가. 시간은 새벽 5:30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학교에 가야 한다.


30분의 쪽잠을 자고 파김치가 된 몸으로 1교시 수업을 듣고 있자니 졸음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깨기 위해 잠시 생각을 돌렸다. 열강을 하고 계신 교수님을 지도자로 국가를 건설하면 어떤 문명이 탄생할까. 미국의 고유 유닛(Unit, 게임에서의 생물)이 ‘B-17’전투기라면 교수님을 지도자로 하는 국가의 고유 유닛은 ‘세계 최고의 언변가’일 것이다. 간디의 정신을 계승해 유혈사태 없이 세계를 정복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수업시간에 엎어져 자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날 기자는 하루 종일 몽롱한 상태로 주변의 모든 것을 문명에 대입시키는 기현상을 겪었고 “그대를 파멸 시키겠다”고 도전장을 내밀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처단할 지략을 모의했다. 문명은 기자 스스로도 몰랐던 잠재적 끈기와 지구력을 알게 해 주었다. 학창시절 이런 끈기와 지구력을 발휘했다면….


반 좀비가 된 기자는 집으로 돌아와 장장 7시간의 전쟁 끝에 나폴레옹을 포함한 전 세계 정복의 꿈을 이루었다. 곧 이어 모니터에 승리자를 위한 메시지가 떴다. “…세계는 당신의 영광된 승리를 오래도록 기릴 것입니다.”


기자는 결국 세계정복을 하고 나서야 문명의 늪에 빠진 발목을 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정복을 이룬 승리자의 기분은 상쾌하지만은 않았다. 아시아 전역과 동유럽, 중동지역까지 차지했던 정복의 화신 칭기즈 칸의 기분도 이러했을까. 컴퓨터를 종료하고 거울을 봤다. 중학교 시절 PC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아이의 그림자 진 얼굴이 언뜻 비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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