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들려온 17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의 우승 소식으로 전국은 들썩였다. 최초 FIFA 주관대회 우승, 여민지 선수의 대회 MVP, 득점왕 소식까지! 귀국 기자회견은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고 연일 그들에 대한 기사로 인터넷은 도배가 되었다. 중대신문은 승리의 중심에 있는 U-17 여자 대표팀 최덕주 감독을 만났다.

최덕주

  2010 FIFA U-17 여자 월드컵 결승전. 일본과 120분의 혈투 끝 결국 피말리는 승부차기가 시작되었다. 혈투는 여섯 번째 키커에게 이어졌고, 골대를 맞춘 일본과는 달리 태극소녀 장슬기의 볼은 그물망을 흔들었다. 이로써 17세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은 FIFA 주관 대회 첫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FIFA 주관대회 첫 우승!
그 감동을 돌아보다

  감격스러웠던 그 순간으로부터 벌써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중앙대를 방문한 최덕주 감독을 어렵사리 만난 자리에서 그는 전날 모교 방문행사를 위해 고향 통영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최감독은 지난 한 달 동안 밀려드는 인터뷰와 텔레비전, 라디오 출연 등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예능프로까지 출연하다니! 최덕주 감독과 여자축구 대표팀에 대한 관심은 가히 범국민적이다. “갈 때는 정말 쓸쓸하게 갔었는데, 돌아오니 정말 180도 달라졌더라구요.”

  전 대회 성적 8강.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의 우승을 예상한 이들은 없었다. “8강까지 올라가보니 남아있는 팀들은 모두 우리보다 강팀이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우리 선수들의 열의가 대단했고 경기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뭔가 사고 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웃음) 그래도 사실 우승할 줄은 몰랐는데…. 우리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월드컵 경기 내내 모든 경기가 혈투였다. 최덕주 감독은 그 중에서도 나이지리아전을 대표팀의 가장 큰 고비로 꼽았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두 골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성인축구에선 2대0에서 역전이 굉장히 힘들잖아요. 결국 연장전까지 갔고 6대5로 힘겹게 승리했죠. 아프리카 선수들의 경우 스피드가 워낙 좋기 때문에 독일같은 축구강국 보다 오히려 힘들어요. 하지만 그 고비를 넘고 나니 스페인은 안정되게 이길 수 있었어요.”

  이번 월드컵 우승의 중심에는 여민지 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대회 MVP와 득점왕을 수상하며 국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여민지 선수는 중학교 3학년 때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대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런데 대회를 앞둔 7월, 십자인대가 다시 파열되어 재수술을 받았다. 실제로 국내훈련은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에서 축구화를 신을 수밖에 없었다. 최덕주 감독은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부상이 아니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며 좋은 성적 못지않은 아쉬움을 내비쳤다.


딸만 셋

“자식을 때려서 키우는 아버지는 이제 없잖아요. 지도자도 잘못된 것을  혼내기 보다는 함께 얘기하며 해답을 구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중대신문과의 인터뷰 中

아버지 리더십을 만들다

  17살.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어린 여학생들을 데리고 거친 운동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리더십’으로 어린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가 딸만 셋을 키웠거든요. 딸들 성격이 참 다른데 20년이 넘도록 함께했으니 여학생들 마음은 잘 알죠. 그리고 사실 딸 키우는 것보다 선수들 키우는 게 더 편하더라구요.(웃음)”

  처음 대표팀이 소집되었을 때, 어린 여학생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서로 간의 견제가 심했다. 실제로 훈련 당시 특정 선수의 플레이를 칭찬해주면 서로 콧방귀를 뀌며 시기를 하던 때도 있었다. 결국 최덕주 감독은 아무리 특출한 실력이 있더라도 팀플레이에 해가 되는 선수는 모두 배제했다. “정말 축구를 좋아하고 즐기는 선수들만 남겼어요. 그래서 질투나 견제 같은 문제는 아시아 예선에서 모두 해결됐죠.”

  그런데 ‘아버지 리더십’이란 언론의 평가와는 달리 대표팀에서의 별명은 ‘켄터키 할아버지’란다. 하얗게 샌 머리카락 덕분이다. 하지만 중대신문과의 인터뷰자리에선 그의 하얀머리를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귀국 후 염색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써 흰머리가 많이 자랐어요. 이제 곧 켄터키 할아버지로 변해요. 지팡이만 들면 딱이죠.”

 

초등학교 축구부 선수에서
국가대표 지도자까지

  최덕주 감독은 초등학교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다. 축구의 도시라 불리는 통영에서 자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축구공을 들고 동네를 뛰어다녔다.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목적 의식 보다 그냥 축구가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는 축구선수의 꿈을 품고 부산 동래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이후 중앙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축구부는 최덕주 감독과 함께 대통령배 축구대회 4강 기록을 세웠고 그는 1984년 한일은행에 입단하게 된다. K리그에서 2년을 보낸 뒤 그는 독일 진출을 모색했다. 무릎부상으로 인해 지도자 생활을 바라본 판단이었다. “독일로 출국해 여러 팀에서 테스트를 받았고 구단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하지만 모두 계약에 실패했죠. 당시 에이전시 측에 문제가 있었어요. 결국 빈손으로 귀국하게 되었죠.” 그는 귀국 후 일본 구단의 영입제의를 받아 현해탄을 건넜다.

  하지만 결국 그는 89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현역 선수에서 은퇴한다. 5년에 불과한 선수생활이 최덕주 감독에게 지금까지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 당시에는 제 자신이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잘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우리나라의 경우 저처럼 부상으로 인해 꿈을 접는 경우가 많아 아쉽죠.”

  그는 일본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고교와 대학, 실업팀에서 14년간 감독을 맡았고 2005년 귀국했다. 대한축구협회의 여자축구 전임지도자에 지원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프로페셔널 자격증을 취득하던 도중 여자축구 전임지도자에 공석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우연찮게 지원하게 되었다”며 여자축구와의 인연을 설명했다.

 

여자축구의 미래를 기대하며

  FIFA대회 우승으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 여자축구의 상황은 몹시 열악하다. 실업팀 6개, 고등학교 여자축구부는 16개가 전부다. 초등학교 축구부의 경우 11명의 선발 엔트리를 못 채우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 등록된 여자축구선수는 총 1천 600명 정도. 하지만 이번 우승을 기반으로 여자축구의 활성화도 기대되고 있다. “독일이나 일본은 건강을 위해 여학생들도 축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재능이 발견되면 선수로 육성되는 식이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생활체육의 개념이 약해서…. 그 점이 참 아쉬워요.”

  그렇다면 여자 축구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최덕주 감독은 ‘섬세함’을 첫째로 뽑았다. “남자 축구같은 폭발적인 스피드는 없지만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플레이가 특징이죠. 사실 축구의 매력은 실책을 메우는 커버플레이에 있어요. 그런 점에서 여자축구만의 섬세한 플레이가 돋보이죠. 아마 이번 대회 중계를 보신 분들이라면 여자축구에 감동하셨을 겁니다.(웃음)”

  실제로 최덕주 감독의 권유로 딸이 축구를 시작한 적도 있다. “아빠가 축구 감독인데 축구 한번 해보자고 말했더니 선뜻 하겠다고 하더라구요. 그 아이들이 중학교 2학년 때였죠. 훈련도 몇 번 받아 봤는데 막상 하다보니 본인 스스로 영 아니다 싶었나봐요.(웃음) ‘재능도 없고 축구 매니저나 해야겠다’는데 차마 더 하자고 못했어요. 아들이 있었다면 아마 무조건 축구를 시켰을 거에요.”

  최덕주 감독은 당분간 12세~15세 유소년 축구 육성에 집중할 예정이다.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축구 전임지도자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엔 다시 팀을 맡을 예정이에요. 여자대표팀도 훈련시켜서 아시아 예선도 나가고 세계대회에서 또 좋은 성적 내야죠.” 거대한 도전을 마친 그는 또다시 출사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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