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시절 강동희는 한국 최고의 천재가드로 평가받았다. 그런 그가 이제는 명장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 감독 신고식을 치뤘던 0910시즌을 보내고 휴식을 누리고 있는 강동희 감독을 만나 그동안 못 털어놨던 ‘강동희 농구관’에 대해 들어보았다.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단국대 체육대학원 스포츠마케팅학 석사 농구대잔치 총 7회 우승 1997년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통합우승, 시즌 MVP 1997년 사우디 리야드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 2005년~ 2009년 원주 동부 프로미 코치 현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

147cm의 키로 농구공을 처음 잡다

- 초등학교 4학년 처음 농구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듣고 싶다
특별활동시간에 우연히 시작하게 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147cm정도로 또래 중에서 키가 큰 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 정식 농구부가 창설되어 농구부에서 활동했다. 그때까진 취미로 농구를 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농구선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 처음부터 가드를 맡았나
아니다. 초등학교 때는 키가 커서 센터를 맡았다. 그러다 중학교 때부터 가드를 맡았다.

- 중학교 때 농구를 관둔 적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작아 농구부에서 잘렸다. 그때까진 선수를 목표로 하지 않았고, 농구에 애착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농구부에서 잘리니까 눈물도 나고 서글펐다. 그렇게 한동안 농구를 잊고 있었다가 중학교 3학년 말 기적같이 농구를 다시 하게 되었다. 당시 군인들이 갑자기 학교 운동장에 놀러와 즉석에서 시합을 제의했고, 반 친구들과 팀을 짜서 시합을 했다. 그때 학교 농구부 선수들보다 내가 훨씬 잘했고, 그 모습이 눈에 띄어서 다시 농구부에 들어갔다. 당시 키가 178cm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정말 특출나게 잘했던것 같다.

- 중·고등학교 농구부는 기합이 많다고 들었다. 고비가 있을 법도 한데
선배들의 구타가 정말 심한 편이었다. 교실에 마포자루가 남아날 일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 선배들의 매를 못 견디고 도망간 적도 있었다. 요즘엔 선배들의 기합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예전엔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맞을 정도로 군기가 셌다.

 

중앙대 진학 그리고 허동택 전설의 시작

- 고3때, 연세대와 고려대의 스카우트 작전이 엄청났다고 들었다. 중앙대에 진학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사실 중앙대는 포지션이 겹치는 선수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대엔 가면 안되겠다 싶었다. 사실 중앙대학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의리’때문이었다. 송도중학교 코치셨던 故전규삼 선생님과 중앙대 농구부 감독이셨던 정봉섭 선생님이 워낙 친하셨기 때문이다. 솔직히 연대나 고대에 가고 싶은 맘도 있었다. 그런데 故전규삼 선생님께서 “연·고대에 가면 제자도 아니다”고 하실 정도였다. 고집도 부려봤지만 결국 중앙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에 잘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결국 1학년 때부터 주전을 꿰찼다.

- 원치 않았던 입학 때문에 방황하진 않았나
입학을 결정한 뒤로는 오히려 재밌었다. 중학생 때부터 허재 선배를 존경했기 때문에 같은 팀으로 경기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1학년서부터 주전이 돼서 딱히 불편한 건 없었고 재미있었다.

- 선수활동을 하다보니 대학생활의 추억이 없을 것 같다
1학년 때 경영학과 친구들과 캠퍼스에서 막걸리도 마시고 데모도 해봤다. 대학생활을 다양하게 해보고 싶었지만 많은 추억이 있는 건 아니다. 미팅이나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도 거의 못해본 것 같다. 1학년 때 한두 번 정도? 안성캠퍼스 체육관에서 운동한 기억이 대부분이다.

- 중앙대시절 허·동·택 트리오가 결성되었다
사실 남들은 서로 찢어져서 운동을 하라고 조언했다. 특히 허재 선배와 날 라이벌 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선배들과 함께 대학생활과 기아구단에서 선수활동을 하며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기록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대중적 인기에서도 농구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허·동·택 트리오를 통해 큰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 최근 대학농구가 많이 시들하다
요즘 대학농구 경기를 보면 80점대가 대부분이다. 중앙대 재학 당시에 성균관대 상대로 137점을 기록한 적도 있고, 기본적으로 100점은 넘었다. 요즘은 연장전까지 가지 않으면 100점 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전반적인 기술적 플레이가 부족한 것 같다.

 

코트위의 마법사, 천재가드 강동희

- 첫 프로팀으로 기아를 선택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진학 하던 상황과 비슷하다. 역시 의리 때문이었다. 현대나 삼성에 가는 것보다 금전적 손해를 보기도 했다. 여론 역시 기아보다는 현대나 삼성으로 가길 원했다. 나 자신도 포지션이 많이 겹치는 기아로 가선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역시 정봉섭 선생님의 ‘의리’를 믿어 기아를 택했다.

- 프로원년인 1997년, 정규리그와 챔프전, MVP를 석권했다
사실 프로화가 늦어지면서 그땐 이미 내 전성기가 지나갔을 무렵이다. 난 내 전성기가 90년대 초반, 아마에서 농구하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프로원년에 이미 33살이었고, 나의 프로생활은 모두 전성기가 지난 뒤였다. 그래도 MVP와 통합우승을 이루며 개인적으로 뜻 깊은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 먹으면서 체력적으로 플레이의 한계를 느낄 때 아쉬웠다.

- 90년대 후반, 국가대표로도 활동했다. 국가대표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였나
어렸을 때부터 국가대표는 꿈이었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선수들이 몸관리 차원과 휴식을 위해 국가대표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난 태극마크를 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 현재 모비스의 함지훈 선수, KCC의 강병현 선수를 비롯해 많은 중앙대 후배가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농구 명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선배입장으로 뿌듯하고 자부심도 느낀다. 중앙대가 계속 농구 명가라는 전통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지금도 ‘포인트 가드 강동희’가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많은 팬들이 아직도 강동희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지금도 훌륭한 선수가 많다. 다만 각기 다른 개성을 갖고 있는 것뿐이다. 아무래도 농구대잔치 시절 농구가 워낙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날 강하게 인식하는 것 같다. 지금도 훌륭한 선수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누가 더 낫다’는 식의 간접평가는 의미가 없다.

- 그렇다면 최근 농구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못 끄는 이유는 뭐라고 보는가
사실 선수들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플레이나 기술이 없다. 단순한 기술만 사용해서 대중들에게 외면 받는 것이다. 대중들이 즐기고 대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플레이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슬램덩크를 예로 들자면 서태웅 같이 플레이 기술이 뛰어난 선수가 필요하다. 강백호처럼 리바운드 같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선수도 뛰어난 선수지만 서태웅 같은 ‘기술자’가 더 좋은 선수라고 생각한다.

 

감독데뷔 첫 해, 플레이오프 진출

- 2004년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에게 은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대부분의 선수들은 은퇴를 원하지 않는다. 나도 더 이상 농구를 못하고 볼을 놔야한다는 허탈감에 정말 아쉬웠다. 마음만 같다면 6,70살까지 농구를 하고 싶었다. 시원하다, 후련하다는 마음은 없었고 아쉬움만 있었다. 또한 지도자로 살아간다는 막연함에 두려움과 걱정도 많았다.

- LG, 동부 코치를 거쳐 2009년 감독으로 데뷔했다. 농구선수와 지도자, 어느 쪽이 더 힘든가
감독이 더 힘들다. 선수 시절에는 내 기량을 갖추고 팀 동료들과 협력해 열심히 뛰면 됐다. 그러나 감독은 모든 것을 다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고 승패에 대한 중압감도 훨씬 크다. 승패에 대한 책임감에 심적으로도 힘들다. 개인적으로 감독은 그리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다(웃음).

- 감독데뷔 첫해 33승을 이뤘다. 이 정도면 합격이라는 평가가 많은데
주위에서 좋게 평가해 주는 건 고맙다. 하지만 칭찬은 칭찬이고 승부는 승부다. 승부세계에서는 1위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제 좋은 평가는 우승했을 때 받고 싶다. 플레이오프 진출로 만족한다면 감독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요즘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메워가며 좋은 감독이 되고 싶다.

-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물론 우승이다. 우승팀 감독이 되고 싶다. 좀 더 표현하자면 나만의 강한 캐릭터와 컬러를 갖춘 최고의 감독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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