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녀는 방 청소도 제대로 하지 않고 세수도 자주 하지 않는다. 요리도 할 줄 모르고 방정맞기까지 하지만 미술관에서 그림 감상하기를 좋아한다. 예식장에서 비디오 촬영 기사로 일하는 그녀는 주례를 자주 서는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림을 구경하듯이. 그녀의 이름을 춘희(심은하)라 하자.

그리고 한 남자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또는 배설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로고스적 사랑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에 속할 뿐이라고 믿으며 요리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청결한 것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냄새나는 동물원을 좋아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육체가 주요 관심사이다. 그의 이름을 철수(이성재)라 부르자.

‘미술관 옆 동물원’은 서로 상반되는 두 남녀가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해 가면서 서서히 사랑을 키워간다는 이야기를 극중극 형식으로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영화이다. 상투적인 대립 구도이긴 하지만 두 주인공은 정신과 육체를 대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헤르만 헤세의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에서 펼쳐진 바 있는 감성과 이성의 대립 양상을 연상하게 한다.

어둡고 침침한 중세 수도원. 엄격하게 사색하기를 즐겨하는 나르치스와, 몽상하기를 좋아하고 여러 여성과의 육체적 관계를 지속하는 골드문트. 영혼과 육체가 하나이듯이 이 두 주인공은 작가 헤세의 두 자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철수와 춘희가 골드문트와 나르치스로 단순하게 환원된다면, 이 영화는 너무나 싱거운 작품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철수는 지극히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육체적이며 춘희는 감성적이지만 선천적으로 지저분하다. 이 영화가 관념의 늪 속에 빠지지 않고 현실적인 구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의 독특한 개성 때문이리라.

춘희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비디오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미술관의 그림 앞에서 대상을 바라만 보고 사랑을 상상함으로써 순애보를 꿈꾼다. 따라서 그녀의 사랑은 피사체와 시선 주체의 거리만큼이나 두꺼운 공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대상과 한 몸이 되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철수에게 춘희는 세상 물정 모르는 맹한 처녀일 뿐이고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희귀종일 뿐이다. 사랑이란 직접 만지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적 접촉이 없는 사랑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철수를 춘희는 동물이라 부른다.

삐꺽거리기만 하던 이 두 남녀에게 있어 시나리오와 비디오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사랑의 좌절을 맛보았지만 시나리오(컴퓨터)와 비디오(TV)라는 가상현실을 통해 사랑을 차지한다. 밤하늘 별들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던 철수와 알몸의 사랑학을 배우지 못했던 춘희는 결국 동물원과 미술관 갈림길에서 키스로 화해한다. 이 서사 구조는 시나리오 속 인공(안성기)과 다혜(송선미)의 서사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영화는 춘희가 철수를 찾아 나서는 길거리 장면에서 인공과 다혜가 탄 자전거를 지나가게 함으로써 현실과 환상의 벽을 허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가 현실과 가공의 세계를 넘나들며, 정신과 육체가 섞이는 후기 근대에 와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먼 훗날, 이들 노부부에게 남아있는 오랜 사랑의 흔적은 오직 단 한 편의 비디오일지도 모른다. 마치 춘희가 결혼식장에서 여러 부부들의 인생담을 필름에 담아 놓았듯이, 철수가 춘희의 모습을 비디오에 새겨 놓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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