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방학 성폭행사건으로 해임된 K교수가 복직을 시도한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K교수는 지난 해 두 차례의 성폭행사건과 성추행사건에 연루되었다. 성폭행사건의 시시비비는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노래방에서 여자 원우의 가슴을 만진 성추행사건이 인정되어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그런데 성폭행사건이 재판 1심과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K교수가 그것을 이유로 복직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추행사건이 엄연히 사실로 인정되어 교수에서 해임된 것이니, 이제와 성폭행사건이 무죄 판결을 받는다고 해서 복직이 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K교수의 복직시도는 한 문장으로 마무리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근심스럽게 만드는 것은 지난 9월 1일자 중대신문의 총장 인터뷰이다. “무죄판결이 나면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법에 따라야”하며 “그 동안 못 준 월급까지 지급해야 한다”는 인터뷰의 내용은 변화된 학교와 학생들의 위치를 실감하게 한다.


 취업으로 인한 학점 경쟁이 과열되면서 교수와 학생과의 사이는 권력관계로 나눠지게 되었다. 이른바 ‘학점권력’이 생긴 것이다.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간의 관계는 이제 학식을 나누고 서로의 의견을 토론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인 강의와 학점권력으로 변화되었다. 저번 1학기부터 시작된 상대평가의 강화는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때문에 학생들은 학점을 위해서 교수의 성희롱적 발언에 침묵하고 부당한 처우에도 그저 참아낼 뿐이다. 대학원에 가면 이 학점권력이라는 것은 더욱 심화된다. 석사?박사 학위 논문의 통과가 전적으로 교수의 심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학 내에서 위의 K교수사건과 같은 사건이 비일비재해도 크게 드러나지 못하고 묻히기 일쑤이다. 게다가 K교수사건에서 보듯이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여성은 더욱 취약한 위치에 있다. 우리는 교수가 우리의 몸을 두고 감칠맛이 좋다고 해도, 한밤중에 교수가 호텔로 자신을 불러낸다고 해도(그리고 거기서 벌어질 일이 뻔하다고 해도) 곧바로 화를 내거나 거절하지 못한다.


 물론 모든 교수들이 그렇게 학점이나 논문심사의 권한을 권력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장려하고, 강의실 안의 누구도 차별을 느끼지 못하는 올바른 강의실 문화를 이어나가는 교수님들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은’ 교수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때 수강생들이 대처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학생들은 1만 3천 ‘소수자’에 다름없다.  ‘소수자’라는 위치는 선천적으로 날 때부터 받는 낙인이 아니라,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구성될 수 있다.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사건인 것 이다. 차별의 화살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돌아올 수 있다. 나 하나만 잘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나 하나도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변화하는 위치를 자각하고 주변을 다시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윤진 녹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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