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의 주입식 철학 사유하기, 전후 미국중심의 철학 사유에서 부터 근대 이후 유신시대의 맑스 대안론과 사구체논쟁. 그리도 말 많았던 프랑스 철학 유행과 최근 근대 탈근대 논의와 제3의길을 둘러싼 미묘한 환상이론까지 그간 우리학계를 휩쓸고 지나간 서구의 이론을단숨에 언급하는 것은 숨이 찰 지경이다.
이러한 서구 철학의 수입은 그때마다 수많은 논쟁점들로 학계를 들썩이게 하였고, 지식인의
‘식민성’문제도 일부 비판적 학자등에 의하여 끊임없이 언급되어 왔다.
김영민 교수와 조한혜정 교수의 탈식민지성 논의와 그에 따른 새로운 글쓰기 문제도 그 정
점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도대체 지식인 문제가 뭐길래 이렇게 때만되면 언급되고 찢겨지며 더러는 서로를 상처내는
것일까.

다시 불붙는 지식인 논의

지배와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태어난 중간자.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의 개념은 언제까지 유
용한 것인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는
도구로서 이용당하고 종국에는 지배계급의 앞잡이로써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사르트르의 지
식인.

다시금 사르트르를 추억하게 되는 것은 때만되면 나타났다. 공염불로 그쳐버리고 마는 지식
인의 정체성 문제가 세기말의 기류를 타고 다시금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른
바 신지식인의 열풍을 타고 마치 신지식인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양 떠들어 대고 있는
현 정권, 아니 일부 학회자들에 대한 반대급부적 반작용 때문일까.
지난 7일 대학원 총학생회(회장: 김진태, 연극학과 석사 3차) 주최의 포럼은 이러한 정체성
의 부제라는 혼돈상황에서 ‘지식인’이라는 범주를 넉근히 차지하고 있는 대학원생으로서
의 정체성, 즉 과연 지식인이란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 한 자리였다

‘과연 나, 그리고 너는 지식인 인가’ 강진숙(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강사)은 일반적이어서
오히려 도발적으로 들리는 것은 정체성의 부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서로 어울려 지내면서 내적인 생성의 힘을 만들어 내는 지식인과 다양
한 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해가는 언술활동에 능한 지식인이었다.

'너는 지식인이었는가? 왜 머물곳도 없이 떠도는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지향한다는)대학
원생들은 지식인으로서 보다 고상한 본연의 불평은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는 또 질문을
던진다. 시대정신을 가진 대학원생, 성공시대를 위해 들어났든 차후 어떤 길을 가든 공부하
는 대학원생이라면 학술운동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좌익 이데올로
기를 던져버리고 우리가 처한 일상의 고유한 색깔이 담긴 학술운동에 매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일상의 고유색깔의 바탕은 당연히 자기 터전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가 주목하게 된
것은 당연히 ‘성찰’의 개념 즉 자기 검열.
결국 지식인은 자신이 처한 시대의식과 자기 색깔을 가지고 몸으로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국 자기검열은 자생성이라는 부분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자생성? 이 부분에서 생명이 없는 논문 쓰기의 고민과 논쟁을 생산해 내는 ‘비판의 복원’
분과학문적인 폐쇄성을 극복하는 열린 학술 풍토를 제안한다. 그의 고민은 지식의 ‘성찰’
부분에 경도된 나머지 김영민 교수의 그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다.

올바른 지식인 상

그렇다면 올바른 지식인 상은 무엇인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박
영준(한국외국어대 국제관계학 박사 수료)이 주목한 것은 ‘저항적 지식인’. 하지만 지식인
의 저항성은 체제 비판적인 최루탄 냄새가 아니라 책냄새 그득한 포럼장 처럼 왔다.
‘지식의 저항공간 즉 어느 권력에서부터도 격리된 지식인의 저항의 공간으로서 지성지와
학술지 그리고 포럼의 활성화 아래 모이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러한 억압과 권
력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자본’ 전통적 지식인의 퇴조는 대중문화로 폄하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세계적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기 때
문이다. 따라서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전통의 개념과 신지식인 문제 역시 그는 커다란 세
계자본의 위기속에서 바라본다.
물론 그의 신지식인에 대한 논리는 강진숙의 ‘성찰’의식과 만나면 자기검열을 필요충분
조건으로 하는 사회를 바라보는 개인으로 회귀된다.

따라서 그가 보는 최장집은 권력에 의해 사살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식인의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모두 놓쳐버린 실망스런 인물일 뿐인 것이다.
과연 지식이란 것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된 논의는 신지식인에 이르자 보다 현실적 개념
에서의 지식인 문제로 방향을 선회했다.

결국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이 영국의 토니블레어로부터 온 것이며, 이의 이른바 실용주의 노
선을 지식의 개념에 포함하였다는 점에서 이 역시 지식인의 주체성 개념에서 논지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현정권에 의해 다시금 곱씹어졌고 토론 분위기는 익어 갔다.
과연 엄일한 의미에서의 지식인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대학원생으로서의 지식인 운동을 해
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결론은 주체의 문제였다. 학연협의 패주. “이론의 과잉 속에서 지식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하였다”는 염정민(정치학 석사 수료)의 말처럼 외래사상의 홍수 속에서도 정작 그 이
론으로 현실을 분석하는 틀을 짜는데는 미숙한 우리 지식 생산의 ‘식민성’은 이제 결코
새로워 질 수 없다. 다만 실천으로서 꿈틀대는 지식인의 실천과 그 정점에 놓여 있는 주체
의 복원이 문제되는 것일 뿐.

새로운 학술운동 조직을 위해

이 날 대학원 학술운동의 정점에는 새로운 학술운동의 조직형태가 피할 수 없는 화두로 떠
올랐다. 특정학문을 중심으로하는 분과학문적 학문체계를 넘어 이론영역의 자율성과 분과학
문과 전공영역을 넘나들며, 유연한 조직운영을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외부학술단체와의 연
계 학술정보 획득과 공유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론의 성과물을 ‘글’을 통해 다양한 영역의 주체와 공유되어야 한다는 대학원 총학
생회장의 말은 청중의 깊은 동감을 얻었다. 흔들리는 주체를 다시금 세워줄 수 있는 공론화
의 장이 필요하다는 인식, 더욱이 연구가 표면화 되는 것 자체가 쉽지만은 않은 대학원의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이제 무너져 가는 주체를 복원해야 할 대학원생들의 몫, 그것은 학술운동이라는 실천적 요
인으로서 가능하다는 정점을 향해 나아갔다.
단지 아쉬운 것은 대학원과의 연계 부분은 여전히 각 단위와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주체의
복원에 머물고 있을 뿐이며 지식인 문제에 대한 논의 역시 단지 식민성과 글쓰기 분야에 머
문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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