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 나오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소인국의 대장.’ 우습게도 처음 시인 김성규씨를 보고 든 생각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순진해 보이는 인상, 당장이라도 동화 같은 시를 써내려 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인 김성규는 현실적이다. 그래서 냉철하기까지 하다. 시를 보통 몇 편정도, 어느 시간대에 주로 쓰냐는 질문에 그는 무심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일종의 편견이 있어요.” 시나 음악, 그림은 타고난 재능이나 영감으로 한 번에 작품을 완성한다는 생각을 그는 편견이라고 본다. “잘 써지면 잘 써지고 안 써지면 안 써지죠. 좀 덜 시끄러우니까 아무래도 밤이 낫겠죠?” 이어 시를 쓰는 횟수도 불규칙하다고 말한다. 많이 쓸때면 때면 하루에 1편도 쓰지만 보통 한 달에 3편정도 시를 쓴다고 한다. TV에서 보던 펜을 가져가기만 해도 시 한편이 뚝딱 완성되는 모습과 그가 안고 있는 현실은 확연히 달라 보인다.
 

  김성규 시인에게 시는 인생 그 자체였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한 번 써볼까?’ 하는 생각으로 처음 시를 써봤다고 한다. 그 때 교과서에 실려 있던 김소월·한용운의 작품이 그가 처음으로 만나본 시다. “처음부터 시인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 경제상황이 좋지 못해 돈을 벌 생각으로 사법고시를 생각했었죠. 그땐 왠지 사법고시에 붙기만 하면 부자가 될 것 같았거든요.” 중학교에 진학한 뒤 부자가 타인을 억압하고 권력을 쟁취하는 사람임을 알게 된 후 그의 세계관은 ‘시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는 “제 세계관은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이 세상이 제 작은 노력으로 쉽게 변화할 리는 없겠죠. 하지만 계속해서 도전하면서 얻는 즐거움과 고통이 제 존재 의미입니다.”
 

  김성규 시인은 중앙대와 인연이 깊다. 출판사에 다니다가 제12회 의혈창작문학상에 ‘종각의 나비’와 ‘베개’로 당선된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의혈창작문학상에 당선된 후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춘문예나 여러 공모전에 도전하기 시작했어요. 의혈창작문학상이 제 활동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죠.”
 

  신춘문예에 당선 된 후에는 감격이 아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평생 투고하다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어요. 결국 당선되고 드는 생각은 ‘아 이제 이 지겨움을 그만 둬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뿐이었죠.” 실제로 당선 후에도 생활이 윤택해지거나 경제적으로 도움이 됐던 일은 없었다. 그는 또다시 무심한 듯 말한다. “그래도 뭐, 안 된 것보다는 된 게 낫잖아요.”
 

  당선 후, 그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원래는 서너 명 모여서 술이나 한 잔 하려고 마련한 자리였는데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 출판기념회가 되었다. “시골은 작은 왕국입니다. 작은 일 이라도 크게 받아들이죠. 모르는 분들도 와 계시고 읍내 신문에 까지 실렸어요.”
 

  시의 소재가 잘 생각나지 않으면 그는 억지로 쓰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 시를 꼭 써야 하는 때가 오면 산책을 즐긴다. “도시의 골목은 신경 구조마냥 얽혀있어 안 가본 곳이 꼭 있습니다. 낯선 곳에 가서 느껴지는 감상을 시로 담는 경우가 많죠.” 가보지 못했던 곳을 탐험하듯 다니는 것이 영감이 탄생하는 그만의 비법인 것이다.
 

  김성규 시인의 시는 현실적인 세상을 환상적인 표현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잔인하고 끔찍한 현실을 슬프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의 시 ‘초원의 잠’ 중에서 ‘씹고 있던 고기를 뱉어내듯 사내는 덩어리 기침을 토해낸다’ 등에서 현실을 표현한 초현실적 어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참신하고 기묘한 표현들로 가득한 그의 시어사용은 충격적이다. ‘처녀의 시체’,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 등 우울하고 불안한 시어들이 대부분이다. “제 시가 아주 현실적이거나 아주 환상적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정확히 중간쯤이 아닐까요.”
 

  그는 왜 이런 시를 쓰게 된 것일까. 그는 자신의 경험이 시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했다. “시는 기억의 일부분을 변용시키는 것이죠. 경험을 비틀어서 보여주는 겁니다. 제 시는 세상의 모든 희노애락을 담고 있어요.”
 

  영향 받은 시인을 물어보니 그는 “그 질문 할 줄 알았다”며 손사래를 친다. “미리 생각해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아서 누구 하나를 꼭 집어 얘기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그냥 최승호, 김기택, 정일근 시인 등 제 선배 시인들을 다 얘기하고 싶네요.” 조금 방향을 바꿔 친한 시인들을 묻자 이번에도 곤란한 표정이다. 그리고 곧 말한다. “이번에도 너무 많은데요. 김근, 안현미…. 다 많이 친합니다.”
 

  『너는 잘못 날아왔다』에서 그가 가장 공 들인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마을’이다. 김성규 시인은 공을 들이는 것과 잘 쓴 시가 나오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제일 공을 들였다고 하기보다 개인적으로 마음을 잘 담아낸 것은 하나 있어요. 마지막으로 들어간 ‘존재하지 않는 마을’ 이라는 시입니다. 제 경험과 마음을 잘 살려낸 것 같아 소중한 시죠.”
 

  김성규 시인은 현재 동인 ‘시 힘’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등단과 동인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어 큰 위안이 되었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직업은 혼자 하는 일이라 외로울 때가 많아요. 활동을 시작하면서 서로 위로하며 돕는 점이 좋습니다.”
 

  현실과 환상. 함께 하기에 이질적인 둘을 한 번에 담아내는 김성규 시인. 누구보다도 냉철한 표정을 지을 것 같은, 그러나 누구보다도 환상적인 모습을 취할 것 같은 그의 손끝에서 앞으로도 수많은 시가 탄생하길 바란다.   

 

■작가소개
시인 김성규씨는 1977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2년 제12회 의혈창작문학상 시 부문에서 ‘종각의 나비’, ‘베개’로 당선되었고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로 등단했다. 2008년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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