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수십만권의 책이 그득하고 책방에는 매일 수백권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데 ‘지식 인프라 구축이 가능한가’라고 묻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교수는 물론이고 학생은 자기 분야에서 읽어야 할 책들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지경인데 지식 인프라에 대해 무슨 고뇌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지식, 사회성 반영해야
이러한 논의는 지식 인프라의 양이 아니라 그 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우리의 참된 지식’인가, 곧 그것들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장 세계화 시대에, 지구촌 시대에 무슨 시대 착오적인 것이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국경이 없이 보편적인 지식이 추구되는 자연과학의 경우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을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마찬가지라는 반론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지식도 그것이 발생한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기 마련이므로 그 시대성이나 사회
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컨대 우리의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도 근대 서구
자본주의의 산물이고, 따라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근대 서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고 그렇게 살려고 해도 근대 서구와 동일한 것도, 앞으로
동일하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동일하기는 커녕 보기 나름으로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물어져야 하는 것이 근대 서구, 또는 현대 서구가 과연 우리의 절
대적이고 궁극적인 지향이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모델이 아니라 그 가치에 있다.

지식토대 고민, 겉핥기식에 불과

누구도 일제 식민지시대를 예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제 권력을 비판해도 그 토대가 된 지
식에 대한 비판은 일제 식민사관 외에는 보기 어렵다. 또는 기껏해야 이광수식 민족반역의
행태뿐이 비판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일제시대 지식에는 그런 것만이 문제인가? 일제시대
에 형성된 우리 지식의 인프라는 전면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일제 권력에 봉사한 제국주의적
인 것이었다고 볼 여지는 없는가? 적어도 우리의 서구 근대적 지식이 일제 이후 지금까지
식민지적 구조 하에서 수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특히 지금도 그러한 식민지적
구조가 극복되기는 커녕 남북분단과 제국주의적 세계체제 속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본
다면 우리 지식의 생태적 문제점은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근본적 문제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지식이나 예술 분야는 없다. 그래서 우리
의 지식 인프라는 일제에 의해 왜곡 수입된 서구 지식, 그리고 해방 후 미국 유학 내지 수
입에 의한 제국주의와 그 대응으로서의 사대주의에 뿌리박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까지도 주로 제국주의에 의해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의해 형
성되었다고 볼 여지까지도 있다.

‘왜곡된 서구사상’ 수입 경계해야

그러나 그런 문제점은 우리 현실과 지식의 접합성 문제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검증될
필요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역사적 연원이나 과정을 통해서만 논의될 수는 없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과거가 어떻든 현재 그리고 미래에 서구 근대의 지식이 우리에게 참으로 유
용하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반이 제국주의와 사대주
의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 현실에 접합될 수 있겠는가? 도리어 그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봉사와 사대주의의 심화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역사적 문제는 차치한다고 하여도 우리 현실에 그런 의미의 유용성은 과연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지식 생산메카니즘의 차원에서 미국 일변도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지식 인프라는 우리 현실의 극복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가령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
는 곤혹스러운 IMF체제의 지배에 대해 우리의 미국 중심적 지식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
까? 우리의 지식은 과거에 IMF체제 지배를 예상할 수 있었고, 현재 IMF체제 지배를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며, 미래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젼을 갖는 것일까? 도리어 우리의
미국식 지식이 IMF체제 지배를 초래했고 지금도 그것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이 IMF체제를 주도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그 미국에서 나온 지식이
IMF체제의 유지에 봉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지식접합성, 치밀한 고민 해야
물론 IMF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모두 망라하고 그
것에 대한 우리 지식의 접합성을 검토할 수는 없다. 각 분야에서 그야말로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의 미국식 지식이 우리 현실의 타개에는 그다
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의 지식은 유용하지 못하다. 예컨대 우리의 민주화 과정에 우리의 지
식이 어떤 기여를 했는가? 우리에게 어떤 룻소가 있었고 마르크스가 있었는가? 프랑스 근
대의 룻소, 독일 근대의 마르크스가 아니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룻소와 마르크스가 있었
느냐 하는 것이다. 도리어 반민주적 질곡에 지식은 어용적이거나 반동적인 기능을 충분히
발휘했던 것은 아닌가? 통일에 대해서는 어떤가? 노동에 대해서는 어떤가? 생태에 대해서
는 어떤가?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는 어떤가?

권력에 빌붙는 지식의 ‘허영성’

무엇보다도 지식은 인간의 주체성 회복에 기여해야 한다. 우리의 오랜 민주화 요구는 억압
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자유, 자치 그리고 자연에 대한 요
구였다. 인간이 자유롭고 자치적이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참된 인간적 사회의 요구였다.
따라서 그것은 분단을 강요한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 및 사대주의적 권력국가를 비롯한 모든
권위와 불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전제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지식은 그러했는가? 도리
어 지식은 거꾸로 인간을 억압하는 온갖 권력에 봉사한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 지식은 그
본질로서의 비판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식의 위기가 회자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문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이 위기라
면 그 본질은 지식 자체, 자기 현실의 비판적 인식은 철저히 무시되는 헛된 매판적 근대 서
구 절대화 환상의 체계로서의 사대주의 지식 자체에 있다. 그 전형적인 보기로써 우리는 외
국문학 연구를 들 수 있다. 영미문학을 비롯한 서구문학이 본질적으로 제국주의문학이었다
는 사실은 이미 서구 지식인에 의해 충분히 밝혀지고 있으나 우리 서구문학계에는 그러한
반성이 없고 도리어 어떤 서구인도 관심을 갖지 않는 우리만의 서구문학연구라고 하는 나르
시시즘에 젖어 있다. 그러한 최근의 서구학계의 논의를 답습하는 소수의 외국문학자 조차
보편성으로서의 서구문학을 추상적으로 막연하게 옹호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점은 외국문학만이 아니라 서구 내지 미국 지식을 표본으로 삼는 모든 지식에 공통
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 인프라의 구축은 이러한 서구 지식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고 그것에
대한 사대주의를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서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을 동양에 대한 전면적 인정으로 치환하는 동양주의 내지 한국전통주의를 경계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최근 회자되는 아시아적 가치라고 하는 환상적 지식론을 비롯한 전
통회귀경향이 그것이다. 여기서 그 문제점을 상세히 고찰할 여지는 없고 원칙적 측면만을
강조한다.

지금 우리의 참된 지식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것은 서구 지식의 전면적 부정이 아니다. 문
제가 되는 것은 그 속에 내재하는 제국주의나 국가주의를 비롯한 반인간주의에 있다. 따라
서 서구 지식이 갖는 인류 보편적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동양이나 한국전통
에 나타나는 반인간주의는 당연히 비판되어야 하고 그것이 인간성을 고양하는 차원에서만
수용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지식 인프라의 구축은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지식 인프라의 비판적 기능이 재흥되어야 한다. 어쩌면 가장 간
단한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 공통의 보편적인 명제를 논리적 수면에 올려 인간의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 시대 지식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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