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큰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 땅에서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먹는 일이 먼저인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하는 일이 먼저일 것 같기도 하고, 급한 구멍부터 막는 것이 최고의 생존전략인 것 같기도 하다.

90년대 초반, 세계화를 표방했던 가까운 과거에는 교육시장이 금방 개방될 것 같아 노심초사 그 대응책을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제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다. 한편 IMF로 온통 정신을 못 차리는 판국이 누구 탓이냐를 찾느라 모두가 동분서주하는 상황이 전개되니 이나라 전체의 고개가 그 쪽으로 쏠리고 있다. 결국 중심이 허하고 속이 안차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는 판단 아래 문화예술은 다시 이런 맥락 아래 정신교육의 위치에 자신을 놓느라 분주하다. 이 모든 것이 문화적 요인으로 인해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어떤 상황에 우리가 처했더라도 의연하게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살피려면 우리 나름대로의 정신적 중심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중심의 구축을 위해 정신과 정서 중심을 기르는 문화예술교육은 현재 약간 혼란을 겪고 있다. 즉 일반 문화예술교육과 전문예술교육의 순환구조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중심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교육 체계 내에서의 문화예술 교육이다. 일반교육 체계 내에서의 문화예술은 수용자식 교육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적 감수성을 평균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문화예술에 대해 기술적 참여의 관점에서 먼저 교육을 받으면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 목적과 수단의 전도가 일어난다. 풍부한 삶의 조건으로 문화예술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습득을 위해 채근 당하다 오히려 그것에서 멀어져 감정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충동적 인성을 소유하게 될 소지가 많아진다. 그래서 일반교육 내의 문화예술 교육은 절대 강제성이 있어서는 안되며, 수용자 교육이 대부분을 차지해야만 한다. 즉 소리를 통해 내 조상과 만나기도 하고, 여타 세계 각국의 문화와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삶 속의 소리 채집을 유도하거나, 학교가 있는 지역의 주변 문화에 대한 경험이 우선이 된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이 먼저다. 느낄 시간을 준 다음 여기서 나아가 그런 경험이 문화예술에 대한 건강한 생각을 유도하도록 하는데 일반교육내의 문화예술교육은 기여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일반교육 내에 있는 문화예술 관련 프로그램들은 매일 단순한 감상 위주의 지루한 음악시간이거나, 일년에 두 번 정도 나가는 연약한 사생대회 정도다. 아니면 비디오 감상부 등에서 자거나, 수동적으로 TV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이 주 메뉴다. 음악이라면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 위주적 감상 프로그램 구축이 바람직하다. 문화재들은 늘 문화재 관리국 직원들의 손이 부족한 형편이니 실재적 관리 프로그램이 시간안에 들어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가하면 사생대회보다는 미술관, 박물관 방문이 더 바람직하며, 대중적인 공동체적 작업(벽화)을 보는 것도 좋다. 하찮은 동네의 작은 것들을 돌보고 느끼는 것, 즉 될 수 있으면 지금의 삶 속에 의미있는 수용자적 문화예술 교육이 일반 교육 내에서는 실현되어야 한다. 프랑스는 건강한 프랑스 시민이 가져야할 10가지 소양을 채택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따뜻한 시선, 즉 사랑을 갖는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느낄 대상을 제공하고자 하는 재능있는 전문예술인들도 수용자적 교육은 그들이 서야 할 대전제, 가장 기초가 되는 양분이다. 그러나 전문예술인들은 새로움의 창조라는 길을 가야하는 존재들이다. 문화 전문인, 혹은 전문예술인들은 자신이 갈고 닦은 기술을 뽐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 아닌 타자가 나의 행위의 결과물을 매개로 인간관계의 기본을 회복하도록 도와야 하는 존재다. 그럴 때 다가올 세기의 전문예술인 교육은 덕+기술=능력, 즉 창의적 능력이 소유자 교육이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창조적 문화예술 전문인 교육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도 높은 기준이 요구된다. 문화예술전문인이라 불리고자 하는 자는 덕만 있고 기술이 없어도 안되고, 기술만 있고 덕이 없어도 안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덕의 세계관이 나와 타자를 아울러 공명하게 해야하는데 그곳에 자신이 택한 매개의 기술도 덕 이상으로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기술만 있고 덕이 없는 상태는 현재 우리는 흔히 접하는 최악의 문화예술인들을 양산하는 구조를 만든다. 기술적 우월성에 젖은 예술인들은 경쟁이 가치의 척도인양 사람들을 오도할 뿐이다. 그로 인해 그 예술을 접한 자들의 심성이 상대적 콤플렉스에 걸리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되면 이 사회는 자연적으로 비인간적이고 혼돈스런 가치관을 더불어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과 답이 있다. 전문인은 자기가 선택하는 매개의 관한 한 기술적 달인이 되도록 하는 전반적이고 집중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그리고 더불어 인문적이고 경험적인 프로그램이 동시에 제공되어 일단 접고 희생과 고통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현재 이러한 취지하에 한국예술종합학교 같은 교육기관이 세워졌고, 그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실기전문이라는 모토가 외형적 특징으로 내걸어진 교육목표다. 즉 기술교육을 철저히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이에 못지 않은 태도 변화를 유도하는 경험교육, 분석교육, 지식입력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문화예술은 사회로 환원하는 공동체적 사고와 이벤트를 시시각각으로 열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번 프로그램들의 결실은 아직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할 문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이 모든 노력에 대한 댓가가 안나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덕이란 대학 4년의 교육으로 이룰 수 없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환경이 이미 정신에 뿌리내려 깊은 감연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에게는 지구가 있고 그 안에 한국이 있고, 그 안에 서울이 있으며, 그 안에 학교라는 공간에 있고, 다시 그 안에서 행해지는 여러 인간적인 행위 가운데 문화예술이 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체적 구조 속에 문화예술교육은 과연 어떤 부분일까. 그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라고 가정할 때, 문화예술은 허파와 뇌에 산소를 공급해야만 하는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허파는 각 지체에 산소를 공급하고 각 지체가 살아 움직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유기체의 어느 일면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즉 앞으로의 문화예술교육은 이 전체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무시하는 태도는 제기되어야 하며, 전체의 부분으로서 자신이 역동적으로 처한 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발바닥이 될 수도 있고, 뇌가 될 수도 있으며, 그것이 손, 혹은 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전체에 대한 사고이다.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고의 결과 쓰는 답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부분을 전체로 보는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평을 가지고 있게 된다.

21세기가 온다. 다시 전체에 대한 사고를 하기 좋고, 또한 해야만 하는 시점에 우리는 놓여 있다. 문화예술교육은 자신이 하찮은 부분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며, 그 부분이 어떻게 전체의 건강함을 유지하는데 기여할 것인가 자신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되지 않고 있는, 자기 역할의 본질을 진실로 숙고한 다음, 그에 충실해야 함으로의 인식전환이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요구된다. 방법의 구체적 제안은 오히려 그 다음에 오는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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