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돌아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달린 전구들이 불을 밝혔고 그 사이를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그 틈 속에서 나는 그녀가 될 법한 인물을 찾아보았다. 작고 수줍은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아마도 왜소한 체격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불안하고 긴장되던 마음이 약간은 사그라졌다.

나는 늘 작은 키와 좁은 어깨가 콤플렉스였다. 어디를 가나 얼굴은 그런대로 봐줄만 한데, 체격이 문제라는 소리를 들었다. 축구를 할 때도 짐을 나를 때도 오토바이를 탈 때도 트럭 운전기사를 하려고 했을 때도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런 곳 어디에서도 내게 증명사진이 붙은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적어 넣을 토익이나 토플점수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들은 내 체구를 보았다. 여기에선 무거운 짐들을 날라야 하는데 그 몸으로 할 수 있겠어? 지금부터는 체력전이야 체력전. 이렇게 약해빠져서 어디다 쓰겠어? 만약 인생이 자신보다 덩치 큰 짐을 들어야 하는 거라면, 그들 말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랜 기다림에도 그녀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 또한 어디선가 나의 모습이 드러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실제 오프라인에서 첫 만남을 가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상대보다 내가 먼저 발각되기를 원치 않는다. 나를 숨기고 상대를 탐색하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녀를 알게 된 건 룸메이트를 구하는 어느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딱히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뒹굴뒹굴 한지가 벌써 1년째였다. 누구나 가는 대학에 들어가 어느 대학에나 있는 그렇고 그런 학과에서 대충 시간을 때운 실력으로는 뒹굴뒹굴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러다 뭐라도 하겠지, 생각하시던 부모님이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에서는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서울행이었다. 우선은 서울에 있는 친구 집으로 갔다. 며칠만 신세를 지기로 한 친구의 집에서 나는 한달 하고도 사흘을 더 지내야만 했다. 독립을 하려고 집을 알아보니 내 수중에 있는 오십만원도 안 되는 돈 가지고는 구할 수 있는 집이 없었다. 아무리 싸봐야 전세 삼천이 넘었고 그런 집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여태껏 집을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를 기다리다 지친 나는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사진관에 들어갔다. 집을 구하지 못한다면, 안정된 직장이라도 빨리 구해야만 했다. 나는 이력서를 써야 하는 인생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증명사진이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 표정이 안 좋아요. 카메라 정면 보시구요, 살짝 웃어보실래요?

카메라 렌즈에서 눈을 뗀 사진사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웃을 기분이 아니다. 그녀는 끝내 펑크를 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짜증이 몰려왔다. 이대로 또 친구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친구는 누구보다도 내가 빨리 집을 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혼자 지내기 심심했는데 잘됐다고 말하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내가 계속 얹혀살자, 아무래도 불편한 눈치였다. 그 전에는 자주 놀러왔다던 녀석의 여자 친구도 발 길이 끊겼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사진사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내가 마땅한(기준이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을 지을 때까지 시간을 주자는 의미였던 것 같다. 넌 임마, 스펙이 안 되면 사진이라도 잘 나와야할 거 아니야? 인생 선배로써 주는 배려다. 하지만 결국 사진사는 포기했고, 대충 셔터를 눌렀다.

그때 그녀에게 문자 메시지가 왔다. 도착했는데 어디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황당했다. 하지만, 지금 그럴 걸 가지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사진을 현상 하고 나는 다시 그녀와 약속한 장소로 갔다. 눈이 얼어붙은 바닥에 발을 헛디딜 뻔했다.

증명사진을 찍고 이력서를 쓰고 인터넷 부동산을 뒤지는 것이 나의 한 달 동안의 생활이었다. 셀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썼지만, 내가 이력서를 낸 곳에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나마 연락이 온 곳은, 내가 이력서도 제출하지 않은, 연락처와 이름만 달랑 남긴 한 심부름 센터였다. 그곳은 강남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그 주변은 다른 동네보다 세가 더 비쌌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한 달 월세도 내기 힘든 실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집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 창을 닫으려는 데, 그때 게시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스물 네 평 아파트의 방 한 칸을 세 놓은 그녀의 글이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깡마른 몸매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여자였다. 만난 지 30분이 흘렀지만 그녀는 커피만 홀짝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말하면 조금이라도 집세를 내려 볼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집세는 보증금 50에 30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요.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갖고 있는 돈이 50만원뿐이니 더 이상 부를 수가 없었다. 첫 달 월세는 친구에게 사정해보면 될까.

그녀는 잠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 네, 그리고 …….

그녀가 뒤이어 무슨 말인가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카페에서 틀어 놓은 음악의 볼륨이 높았고 그보다 더 큰소리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 탓 일수도 있지만 무언가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음소거를 시킨 텔레비전 화면 속의 배우처럼 보였다. 여자는 말을 마치고 내 쪽으로 작은 수첩을 밀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 세탁기나 청소기를 사용하지 말 것

2. TV를 보거나 라디오 혹은 음악을 듣지 말 것

3. 반드시 속삭이며 말할 것

 

그녀는 위의 것들을 지킬 자신이 없으면 다른 집을 구해보라고 했다. 만약 지켜준다면 보증금과 집세를 반으로 줄여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갖고 있는 가구가 없으므로 세탁기나 텔레비전 라디오가 있을 리 없었다. 옷 가짓수도 얼마 되지 않으니 대충 손으로 빨면 될 일이었다. 텔레비전 못 보면 안달 나는 나이도 아니었으므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만 세 번째 조건이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작게 말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정사를 나눌 때처럼 귓속에 혀를 집어넣고 애틋하게 속삭이라는 것인지……. 나는 이 부분을 생각하며 잠시 밑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다가 아예 돈을 내지 않고 이 집에 눌러 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더 이상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내게는 오십만원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심부름 센터에서도 역시 내 체구가 문제시 되었다. 실장이라는 작자가 딱히 무슨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이미 일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생들의 체구가 모두 내 두 배쯤으로 느껴졌다.

- 면허증은?

실장은 삼십대 중반의 젊은 사람이었다.

나는 2종 보통 운전 면허증을 내밀었다. 그는 누군가를 시켜 내 면허증을 복사해오라고 했고, 그동안 나는 내 앞으로 보급된 오토바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저희는 안 귀찮습니다. 무엇을 해드릴까요?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고객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는 일이었다. 이 동네에는 희한하게 돈은 많고 게으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기 시간을 쪼개 ‘무엇’을 할 바에 차라리 그에 대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급한 연인들을 위해 콘돔을 사다 나르고 갑자기 마법에 걸린 여자의 오버나이트생리대를 사다주고 생수를 사다주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처리해주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는 일을 하면 되었다.

 

진넥스빌 301호에 사는 고객은 동물병원에 있는 자신의 페르시안 고양이를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고객의 집에서 10분거리인 주주 동물병원에서 그의 페르시안 고양이를 찾았다. 주인이 아니라서 낙담한듯한 고양이는 계속해서 갸르릉거렸고 나는 10분내 찾아간 그곳에서 1시간동안 고양이와 실갱이 해야만 했다.

- 고양이가 주인이 아니라 그런지 까칠한데요, 어쩌죠?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찾아주세요.

웬만하면 고양이와 친구가 되어서 고양이를 안전하고 사랑스럽게 안아 진넥스빌 301호에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몇 개의 주문이 밀려있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강제로 끌어내었다. 고객이 부탁한 다이어트용 고양이 사료를 사고 영수증을 빼먹지 않았다.

철컥, 현관문의 장금장치가 거센 쇳소리를 낸다. 하루 중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다. 내가 현관문을 따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언제쯤 그녀처럼 소리 내지 않고 문을 열 수 있을까. 신중하게 열쇠를 끼워 넣고 심혈을 기울여 돌리지만, 어김없이, 철컥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는 내가 이 집에서 내는 가장 큰 소리였다.

그녀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거실은 어둡고 그녀의 방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아니 그녀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집으로 이사하던 날, 나는 캐리어에 옷가지 몇 개만 가지고 왔을 뿐이었다. 내가 지낼 방은 현관 바로 옆방이었다. 방에는 싱글침대가 하나 놓여있었고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무엇보다도 내 방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거실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돌면 주방이었고 왼쪽에는 그녀의 방이 있었다.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는 데 갑자기 그녀가 다가왔다. 아니 진작부터 다가왔지만 발소리가 너무 작아 그제야 그녀를 인식하고 만 것이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 했다.

-아무도 부르지 않았네요.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싶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삿짐 센터 말이예요.

이삿짐 센터를 부를 정도로 짐이 많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참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사람을 들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약간의 돈을 내기는 했지만 얹혀사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그런 것은 기본이죠, 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을 지나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게 끝이었다, 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와의 마주침은 적었다. 정말이었다.

그 이후,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약속대로 TV를 설치하지 않았고, 세탁기를 돌리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욕실에서 끙끙대며 셔츠 같은 것을 손빨래 하다가 나중에는 셀프 빨래방에서 해결했다.

이제 한 집에 사는 식구도 됐는데, 저녁이라도 함께 먹는 건 어때요? 그녀의 귓속에 숨을 불어 넣듯, 속삭여 보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에 밤을 설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늦게 귀가했거나, 내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섰거나 또 어떤 날은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거나, 그녀가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이제 한 집에 사는 식구도’ 라는 표현은 ‘벌써 함께 산지도 3개월이 지났는데’로 바뀌었고, 그 무렵 나는 조용한 집에서 쥐 죽은 듯 사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그녀와 저녁을 함께 먹으리라 했다. 집세가 밀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매달 집세를 그녀의 계좌로 보내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한 달 월세가 밀린 상태였다. 언제라도 그녀가 내 방문을 노크하며 밀린 월세에 대해 추궁할 것만 같아 가슴을 졸였다. 화장실에라도 가다 마주치면, 어떡하나. 그리하여 나는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였다. 일부러 일찍 출근하고 늦게 귀가했다.

늦은 새벽, 나는 내 방문에 붙은 포스트잇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월세 날짜 지켜주세요’ 그것은 이사 후 그녀가 나에게 남긴, 최초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에게 밀린 방세에 대해 조용히 할 말이 있다며, 내 귀에 속삭여주었더라면, 좀 달라졌을까? 내가 포스트잇을 떼어 그녀가 남긴 활자를 더듬는 동안 조용히 내 곁으로 그녀가 다가왔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내 앞에 있는 건, 방문에 붙은 포스트잇 뿐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도, 자신이 남긴 것이 아니라는 듯, 무심히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나는 출근하는 길에 그녀의 계좌로 월세를 입금하고, 문자를 메시지를 보냈다. ‘월세 입금 했습니다’

이제 집은 완벽하게 조용했다.

 

집에 들어오면 할 일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곳은 '잠만 자는 곳'이었고 나는 '잠만 잘 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비좁은 싱글침대 위에서 몸을 이쪽저쪽으로 뒤척였다. 벽을 바라보기도 하고, 벽을 등지고 있어보기도 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보기도 하고, 베개를 베었다 말았다 해도 역시 잠이 오지 않았다. 심부름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넣은 이력서들.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지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기분.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짜가 초조한 나이. 답답했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사람의 종류를 평생 한 곳에서 사는 사람과 그것을 못 견뎌 하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둘 다 아니었다. 나는 아무 곳에서나 잘 사는 인간이었다. 이 ‘잘’이라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정정한다면, 나는 어디서 살아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 동네에 아주 빠르게 적응했다. 이 동네에는 스타벅스가 열네 개 입점해 있고 백화점이 두 개, 멀티플렉스 극장이 다섯 개, 패밀리 레스토랑이 종류별로 세 개씩, 특급 호텔이 네 개. 그리고 월마트가 있다.

밀린 월세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시간을 죽여야 했던 때, 나를 구제해준 것은 월마트였다.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 만만한 곳은 월마트뿐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이렇게 잠이 들지 않는 밤이면 월마트에 갔다. 사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면증에 시달렸기 때문에, 매일 월마트에 갔다. 그곳은 365일 24시간 언제나 문을 열어두었고 그래서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이 아니더라도 나는 월마트에 갔다.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에는, 밤 10시가 넘어야 마감 세일하는 과일이나 초밥을 사 먹었다. 열대야를 피해 월마트의 냉동실을 뒤져 아이스크림을 골랐고 떨어졌거나, 앞으로 떨어질 크리넥스, 샴푸, 치약같은 것들을 구매했다.

새벽 1시, 월마트는 청소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바리케이트 쳐놓은 일부 공간을 통행금지 시킨다. 머리가 하얗게 된 노인들이 청소기를 돌리고 물건을 정리한다. 캐셔도 두 명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프로모션 상품을 꼭 좀 사달라고 호소하는 나레이터도 없고, 시식코너도 없다. 기필코 무엇을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늦은 쇼핑을 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이제야 일어나 할 일을 찾는 사람, 혼자 사는 독신자들,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와 같은 부류, 남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연예인도 종종 있다. 나는 한가롭게 월마트를 산책한다. 진열대에 놓인 물건들을 여유롭게 카트에 집어넣는다.

갑자기 개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진열대 사이로 사라진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컹컹 컹컹. 개는 생수 더미 사이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냉장실에서 우유를 고르던 할머니가 무릎을 꿇고 개의 등을 쓰다듬었다. 마트에 데리고 오기에는 큰 개였다. 먼 나라에서 눈썰매 좀 끌던 그런 개였다. 그렇다고 불쾌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할머니와 개의 산책을 흔쾌히 인정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500ml 우유 두 개를 주워 카트에 담고, 식품코너를 한 바퀴 더 돌아 식빵을 사고 햇반을 구입했다.

 

그녀는 아직도 들어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벌써 잠이 든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거실을 지나 주방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돌렸다. 냉장고에 있는 즉석식품을 몇 가지 더 돌렸다. 냉장고에는 정확히 그녀의 것과 내 것이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각자 알아서 양심껏 자기 것만 먹었다.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된 우유가 있어도 서로 자기 것이 아니면 버리지도 챙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끔씩 상한 고등어 같은 것들이 오랫동안 우울하게 남겨지기도 했다.

나는 즉석식품들을 쟁반에 담아 조용히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정적만이 흘렀다. 그 정적속에서 나는 햇반을 먹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사무실이었다.

아침 열시부터 밤 아홉시까지가 내 타임이었지만 일손이 부족해서 그 이후에도 주문이 들어오면 가끔씩 대타를 뛰어줘야했다. 그래도 내 시간보다 건당 얼마씩 더 챙겨주기 때문에 나는 군말 없이 먹던 햇반을 쓰레기통에 넣고 음식물은 대충 화장실 변기통에 버리고 주문을 받으러 갔다.

보통 주문은 새벽 시간대에 많이 들어왔다. 이 야심한 시각에 주문 오는 것들은 뻔했는데, 모텔 체크아웃을 했는데 열쇠를 안 갖다 줬으니 대신 반납해달라거나, DVD빌려다 주기, 야식 배달 등등, 그런데 이번에는 예상외의 일이었다.

술 취한 여자친구를 대신 데려다 달라는 것이다. 아뿔싸. 고객은 여자친구와 헤어지려고 작정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술 한 잔 하며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이 질긴 여자는 고객을 끝까지 잡았던 모양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마구 술을 뱃속에 집어넣었고 당연히 고객이 자신을 데려다 주겠지 했는데, 아뿔싸, 고객은 영리했다.

고객의 여자 친구는 강남역 6번 출구 지오다노 앞에서 자빠져있었다. 한참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던 고객은 나를 보더니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내게 얼마를 주면 되냐고 물었다. 사례비는 기본료와 심부름시킨 물건 가격의 20%정도를 더해 받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우선 이 여자의 집이 어딘지를 물었다.

고객의 여자친구 집은 신사동이었고 여기서 택시를 타면 얼추 육천원이 나올만한 거리였다. 이 여자는 얼마인가요?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와 이렇게 묻고 말았다. 고객이 지갑을 반쯤 열은 채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정도면 되겠죠? 하며 사만오천원을 주었다. 사만원이면 사만원이고 오만원이면 오만원이지 사만오천원이 뭐람. 아마도 사만오천원은 그가 그녀를 위해 지불할 수 있는 최대치의 돈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 그가 가진 돈의 전부가 사만오천원이었거나.

나는 그 사만오천원으로 고객의 여자친구와 여관에 갔다. 그녀의 수준이 어디까지인지인지는 모르나 이 동네에서 사만오천원으로 갈 수 있는 수준은 여관이었다.

여자는 내가 자신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심부름센터의 직원인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아마 남자친구의 친구쯤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택시를 태우려했지만 여자는 말을 듣지 않았고, 하릴없이 나는 담배 한대를 피웠다. 그러다 여자가 갑자기 불현듯 벌떡 일어나 택시를 잡았다. 얼떨결에 따라갔는데, 여자는 거기서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 내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 재미가 어때?

여관을 나서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한 달여간 신세졌던 친구 녀석의 문자였다. 재미는 무슨,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답장하기가 귀찮아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는 데 그걸 눈치 챘는지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여자랑 사니까 좋아?

내가 방 한 칸을 얻어 사는 것을 아는 녀석이었다. 그는 집주인이 여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녀와 로맨틱한 밤을 보냈다거나 혹은 분위기 좋은 바에서 칵테일을 마셨다거나 심지어는 다툰 적도 한번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우린 속삭이기만 할 뿐이야

녀석의 끈질긴 질문 공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한마디 했다. 처음 룸메이트 계약을 했을 때, 나는 그녀와의 로맨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미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그녀가 처음 속삭이면서 말하자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흥분이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녀와의 생활이 누군가와 함께 사는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 뭘 속삭이는 데? 사랑을? 와, 이 자식 여자랑 살더니 시인 됐네, 시인.

녀석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나는 녀석의 소중한 상상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저녁반찬을 위해, 나는 월마트에 간다.

저녁 일곱 시, 월마트가 가장 활기찰 때이다. 월마트 주변에는 벌써 재건축이 끝나고 입주가 한창인 아파트가 떼로 몰려 있었고 다세대 주택과 빌라 역시 많았다. 이 시간 때는 가족이라고 불릴만한 가정을 가진 주부들이 제일 많았다. 그들은 시식코너에 있는 음식들을 한번씩 집어먹고 한개 더 껴주는 만두를 구입했으며 할인쿠폰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카트에는 두부와 단호박과 대파와 대용량의 고추장, 10KG쌀 같은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들 틈에서 나는 어느 가정의 식탁을 위한 식재료가 적힌 쪽지를 들고, 카트를 움직였다. 고객은 핫케익을 만들 것이라 했다. 나는 네이버에서 핫케익 레시피를 검색해, 필요한 재료를 적었다. 그리고 ‘유기농’ 이라고 쓰고 별표를 쳤다. 고객은 모든 재료를 꼭 유기농으로 사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 가정의 식탁에는 오늘 내가 구입한 유기농 계란과 중력분으로 만든 로하스 스타일의 핫케익이 올라갈 것이다. 4인분이라고 했으니, 남편과 아이가 있지 않을까. 핫케익을 직접 만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신혼부부일 가능성도 있다. 나는 잠시, 그들의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해본다. 제가 사온 유기농들이 어때요? 그녀의 아이들이 웃으며 케익 위에 꽂힌 촛불을 하나씩 끌 것이다.

진공 포장된 설탕 봉지를 주워 담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 혹시… 심부름?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수치심 같은 것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몸에 밴 습관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여자는 전화번호를 물었고, 비용을 물어봤고, 자신의 집은 논현동인데 거기까지도 배달을 하는지, 그 외에도 몇가지 더 질문을 했다. 나는 대답대신 일목요연한 전단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세요, 1588-8245(빨리사와).

주인 여자가 나간 모양이다. 현관 앞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그녀가 자주 신는 구두가 없다. 나는 좀 자유롭게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에 가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먹고 냉장고를 열어본다.

냉장고에는 오래된 고등어가 그대로 있다. 나는 고등어를 산 적이 없으므로 분명 주인여자의 고등어일 것이다. 나는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 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두고 냉장고 문을 닫는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내 눈에는 썩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싱싱한 고등어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6월이었고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와 토고의 경기가 있던 날, 나는 비번이었다. 나는 일부러 늦잠을 잤다. 잠에서 깨면, 다시 억지로 잠을 잤다. 또 다시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취업을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연락이 오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는 걸 그만두고 싶었다. 마침 장기 근무로 심부름센터 아르바이트의 시급이 올랐고, 부지런히 돈을 모아 내 이름으로 된 가게를 차리는 게, 회사에 취업하는 것보다 더 빠르겠다는 계산이 생겼던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인지 허리가 쑤셔왔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누웠다. 그때 나는 천장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쿵쾅 쿵쾅, 머리 위로 금방이라도 천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위층 사람들이 한꺼번에 점프를 하는 소리였다. 이번엔 창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파트가 통째로 들썩였다. 사람들의 함성소리는 거대한 폭풍처럼 몰려와 나의 방 앞에서 멈추었다. 모두가 점프를 하고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고 난리였다. 우리나라가 한 골을 넣은 것이다.

순간, 나는 소리 지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우리나라가 한 골을 넣었든, 한골을 넣으려다 말았든, 열 받게 토고가 한 골을 넣었든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하지만 결국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대신 나는 월마트에 갔다.

월마트는 조용했다. 모조리 월드컵을 보러 간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DMB를 켰다. 3사 방송사가 모두 축구 중계 중이었다. 안정환이 중거리 슛을 날렸다. 골대를 스칠 것 같더니 공은 시원하게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안정환의 골세러머니가 이어졌고, 붉은악마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었다. 곧 화면 가득 빨간 파도가 일렁였다. 나는 멀미가 날것처럼 어지러웠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티셔츠만 입은 여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조용한 월마트 블록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낯익은 모습이었다. 바로 주인여자였다. 보통 속옷을 입지 않고 겉옷만 걸치는 여자들은 새벽에 나타나는데, 월마트의 새벽이 조용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옷을 입은 채로 나오는 여자들도 있다. 그녀들에게 월마트는, 어두운 밤 가장 안전한 산책코스가 아닐까.

나는 주인여자가 무엇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쓸데없이 아동용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고 서점에서 잡지를 훑어보고 야채들을 들었다놨다했다. 우리는 월마트 안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를 본척만척했고 나또한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 단지 월드컵 기간에 떼로 응원을 나가지 못한 사람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집에 언제 가는 것이 좋을까? 가다가 그녀를 또 마주치면 어떡하지,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다면?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동시에 열쇠를 꺼내고 현관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정 속에서 주인 여자와 나는, 똑같은 열쇠를 가지고, 똑같은 문 앞에 서서, 서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날, 결국 누가 먼저 집에 들어가고 나중에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축구는 16강도 못 갔다고 한다. 맥이 빠진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여전히 심부름 센터에서 일했다. 그 사이 단골도 생겼다. 내가 사다주는 야채가 신선하다고 일부러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준 고객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독실한 기독교인지 무교인지, 그런 걸 물어오지는 않았다.

추석이 다가오자 월마트는 대목을 맞았다. 내가 살 수 없는 물건들이 대거 팔려나갔고, 싱글들의 심부름은 뜸했다. 서울인구가 고향에 내려가고 거리는 한산했다. 추석 연휴에도 월마트는 쉬지 않았고, 한복을 입은 나레이터들이 내게는 필요 없는 추석선물세트같은 것을 자꾸 권유하였다. 나는 한 개를 더 껴주는 즉석스파게티를 샀다.

우편함에 편지가 가득 찼다는 것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각종 고지서들과 광고 전단지,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보는 신문도 밖에 한참 쌓여있었던 것 같고. 나는 이상한 마음이 들어 냉장고로 달려가 보았다. 고등어가 여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뜻밖의 편지 때문에, 썩은 고등어를 금세 잊고 말았다. 월마트가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편지에는, 얼마 후 월마트가 문을 닫는다고 적혀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일회용 면도기와 즉석스파게티를 팔았던 곳이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월마트는 마지막 고별전을 한다며. 특가 세일할 예정이라고 했다. 20년전 그 가격으로 모시겠다며, 꼭 방문해주길 부탁했다. 어쩌면 편지는 누구에게나 보내는 귀찮은 ‘찌라시’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고딕체의 ‘월마트 고별전, 창고大개방’이라는 글자를 보고 계속 눈물이 났다.

3일후면 월마트가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필요한, 필요할 것 같은 것,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앞으로 필요해질 것들을 카트에 담았다. 4인용 코펠 세트와 여성용 바디용품과 절대 입지 않았던 삼각팬티와 손톱깎기같은 것들이 방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내가 카트에 물건을 담고, 방 안에 쌓아두는 동안, 집 안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냄새는 냉장고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고등어, 주인 여자의 고등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냉장고를 열어볼 시간이 없었다. 월마트가 고별전을 하고 있다. 설사 냉장고를 열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썩어버린 고등어를 발견하였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일은 고작, 주인 여자가 고등어를 처치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 밖에 없었다.

이제 월마트는 영영 사라진다. 나는 월마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달려갔다. 그에게 작별인사 하고 싶었다.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월마트가 그리울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더욱 그리울 것이다. 나는 늘 불면증에 시달리므로, 매일 그리워질 것이다. 집세가 밀리는 달에는 어디에서 시간을 보내야할까. 더 이상 살 것이 없었지만 나는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24시간 운영하던 월마트는 오늘 자정까지만 운영한다고 했다.

그동안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월마트가 내게 말했다. 나는 오래된 친구 하나를 잃은 기분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습기 가득 찬 공기와 함께 악취가 내 몸에 엉겨 붙었다. 한 마리의 고등어가 이렇게까지 지독한 악취를 풍길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보니 주인 여자는 게으른 성격인게 분명하다. 이렇게 냄새가 심한데, 어떻게 여태 고등어를 치우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냄새의 근원지 냉장고로 갔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고등어는 없었다. 이미 썩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치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고등어 썩는 냄새가 계속 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똑. 똑.

거기, 계세요?

그쪽에도, 고약한 고등어 썩는 냄새가 나나요?

나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방문 앞에 섰을 때, 그리고 냄새의 근원지가 바로 그녀의 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대신 그녀의 방문을 열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오랫동안 썩어 방치된 그녀의 시체를 상상해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책상에라도 앉아 그녀가 책을 읽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영문이냐고 물어오면 어쩌지?

 

 

나는 결국 그녀의 방문을 열어보지 못하였다. 물론, 노크도 하지 못했다.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이 소리를 내려던 순간, 이 정체불명의 악취가 주인여자에게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숨쉬기가 곤란했고, 조금씩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고 구역질이 났고 곧 토할 것만 같았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습관처럼 월마트로 달려갔다.

하지만 월마트는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고개를 들어 아직 남아있는 월마트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불이 꺼진 간판은 무척 왜소해보였다. 한쪽 균형을 잃은 플래카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월마트가 나를 향해 손 흔드는 듯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을 굳게 닫은 고층 아파트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의 악취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날에는,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나는 벌써부터 월마트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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