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다’, ‘편안하다’.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의 마지막 책장을 넘긴 후 든 느낌이다. 아픔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쓴 작가는 분명 외로운 사람일 거라는 짐작 때문일까. 지난달 28일 강남역 부근에서 만난 김서령씨(예술대 문예창작학과 93학번)의 쾌활한 목소리는 의외로 다가왔다.


김서령. 상서로울 서(瑞), 옥소리 령(玲). 흔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특색 있는 이름의 뜻을 묻자 그녀는 웃음부터 터뜨린다. “할아버지가 무협지를 좋아하셨어요. 제일 좋아하는 책에 나오는 자매 이름이 애령, 서령이었대요. 그래서 언니 이름은 애령, 제 이름은 서령으로 지어주셨죠. 어렸을 때는 화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어요.”


그녀의 첫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속 아홉 작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아픔을 가지고 있다. 김서령씨는 이들을 어설프게 버려져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외로운 느낌을 가진 ‘어설픈 이방인’이라 표현한다.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속 유리와 진하, 윤지는 친남매도 부럽지 않은 우애를 자랑한다. 하지만 연인사이인 진하와 윤지 사이에서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을 느끼던 유리는 진하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죄책감에 그들 곁을 떠난다. 두 연인 사이의 ‘어설픈 이방인’인 유리가 느꼈을 외로움, 다시 돌아온 그녀 앞에 놓여진 진하와 윤지의 죽음에서 겪는 허탈함이 김서령씨의 소설을 전반적으로 관통하고 있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도 마찬가지의 외로움을 환기한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앨리스는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불륜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남자는 다쳐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도 여자에게 “가”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여자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남자를 사랑했던 7년이 완전히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외롭다 못해 괴로워하는 앨리스의 아픔이 담백하게 마음을 울린다.


김서령씨의 소설이 ‘외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절대 해피엔딩이 아닌 결말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그녀는 “단편은 장편을 짧게 만들어서 요약한 것이 절대로 아니에요”라며 항변한다. “삶의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중의 한 부분만을 그린 것이 단편이라고 생각해요. 종착역이 어딘지는 아무도 모르지. 혹시 알아? 소설이 끝나고 무슨 일이 생길지. 그러니까 내 소설은 절대로 비극이 아니에요.”


어째서 아픔과 상처가 있는 인물만을 그리냐는 질문에 그녀는 발끈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김서령씨의 소설은 편안하다.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시점도 자주 바뀌지만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자유로운 문체는 읽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나는 소설을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죠.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서 굴러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길 원해요. 읽는 데 큰 무리 없지 않나요?”


소설 속 김서령씨의 자유분방함은 여행 스타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기보다 한 곳에 정착해서 그곳 주민들처럼 살아 보는 것을 즐긴다는 그녀는 런던, 호주, 일본, 지중해 등을 여행한 베테랑 여행자다. 그러다 보니 호주, 필리핀 등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배경이 자주 등장한다. 낯선 곳, 특이한 곳에 주목할 때마다 ‘이곳엔 누가 살까’를 상상해 ‘장소에 대한 이미지’를 소설로 구상하는 그녀의 버릇 탓이다.


“사람들은 내가 늘 여행만 다니는 줄 알아. 내가 그런 사람으로 ‘찍히는’ 것 같아서 이제 그만하려구”라며 억울해하는 김서령씨. 하지만 6개월간의 일본 체험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로 미루어 보아 조만간 김서령표 이국적 소설이 또 하나 등장할 거라는 강한 예감이 스친다.


세 자매 중 둘째인 그녀는 고향인 포항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우애가 좋단다. 결혼한 언니와 동생의 시부모님 생신까지 챙기는 살가운 사이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 덕분인지 김서령씨의 소설에는 주로 여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설집 속 유일한 남자 주인공 시점의 단편 「고양이와 나」도 따지고 보면 주인공은 남자의 아내다. 「고양이와 나」는 아내가 겪는 피곤함과 외로움, 그리고 지겨움을 남편의 시선을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이혜경 소설집 『꽃그늘 아래』에 수록된 단편 「검은 돛배」를 ‘위로’받은 최고의 소설로 꼽는 그녀는 “소설은 마음을 토닥토닥 해주는 위로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김서령씨의 소설은 아픔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 순간 마음을 툭 건드리며 예고 없이 쳐들어온다. 그녀는 “상처와 맞부딪치지 않으면 상처는 절대 낫지 않는다”며 어느 순간 독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아픔을 건드리고, 그것을 치유하는 것이 소설이라 말한다.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속 홀로 남은 정민이 ‘작은 토끼’라면 정민을 보듬어 주는 태원의 식구들은 ‘위로’다. 김서령의 소설 앞에서 독자들은 ‘작은 토끼’가 된다. 김서령의 책을 펼치면 그녀가 속삭인다. “힘들었지? 나랑 얘기하면서 좀 풀자. 내가 위로해줄게.”

 

 


희망도 절망도 없는 ‘살아가는 이야기’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실천문학사

예술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김서령씨는 2003년 <현대문학> 신인상에 「역전다방」 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에는 선정 대산문화재단에서 대산문학기금을 받았으며 이듬해 해외연수 창작기금으로 영국을 다녀왔다.
그녀는 호주, 일본, 필리핀, 그리고 영국으로의 장기 여행을 통해 문학의 영감을 얻는다.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는 이러한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쓴 김서령씨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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