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분야는 ‘푸대접’을 받고 있으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평가절하의 양상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문화재관리국의 총원과 무형문화재분야의 인원, 특히 전문 학계직의 숫자를 비교해보고, 전체 예산에서 무형문화재분야가 차지하는 비율을 분석해보면 아주 간단하게 드러난다.

푸대접 받는 무형문화정책

현재 세계는 제1세계 중심의 유형문화재관에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제3세계는 유형에서 무형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인식의 근거로 등장한 지 오래다. 지적소유권의 시대, 정보산업사회에서 무형문화는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며, 자산가치만으로도 무한대다. 무형예술문화를 산업화시켜 성공했을 때, 그 자산은 무한대로 번식한다. 또한 무형의 문화에는 민중의 집적된 총의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평등한 문화로서 보장받을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가령, 가람의 훌륭한 절집이 소중하다면, 그 내용물을 채우는 것은 건축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양에 쓰이는 사찰음식전통, 의례에 쓰이는 범패 따위의 음악 무용적인 예술도 소중하다. 사찰을 고스란히 뉴욕에 움직여 놓을 수는 없어도 범패는 워싱톤에 가서도 공연이 가능하다. 놀라운 기동성을 지니고 있고, 문화적 확산도 가능하기 때문에 무형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무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되며, 무형문화재정책에서 무엇보다도 정책적 전환이 요구된다.

무형문화는 문화산업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국민의 정부 신문화정책의 기본골격은 경쟁력 있는 문화산업의 육성이다. 그러나 21세기 문화산업전략을 논하는 지향점에 무형문화가 거론되지 않고 영상·만화 따위가 거론되는 것은 지극한 편향이다. 식혜가 깡통을 만나 새롭게 태어났듯이 법고창신하는 정신이 있다면 전통적인 무형문화가 21세기에도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식혜가 깡통에 담겨져서 프랑스인의 냉장고를 차지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무형문화재에 대한 전반적인 ‘푸대접’은 지극히 커다란 정책적 오류다. 우리는 현재, 분명히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관광부에서는 무형문화재 제도 개선을 마련한다고 한다. 제도 개선은 문자 그대로 미봉책이다. 오늘은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지 부분적인 ‘제도 개선’은 의미가 없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을 바꾸지 않고 개혁은 힘들다. 무형문화재정책 분야에서 문화재위원 및 문화재전문위원을 선임하는 명확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행정적 효율을 꾀하면서 전문학예직의 확충도 요구된다. 법은 준수되어야 하며, 잘못된 법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 일단 합의하여 규정된 법이 있다면, 그 법에 따라서 공정하고 사회적인 절차를 밟아서 임명하고, 임명된 위원은 응당 정당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아야 한다. 권한의 보장은 반드시 책임소재를 함께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 동안은 제대로 된 권한도 없었으며, 책임을 지는 일이 거의 없지 않았나 반성해야 한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혹시 장기독점은 없었는가, ‘낙하산’ 인사는 없었는가, 비전문가나 ‘민속 아마추어’의 영입은 없었는가, 비전문인이 불필요하게 무형문화재 정책에 개입하는 일은 없었는가 등도 점검해야 한다. 무형문화계 이외의 영역, 가령 언론계 등에서 불필요하게 개입한 부분이 있으면 이 기회에 일정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민의 정부가 그러한 ‘눈치’를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또한 그러한 제반 문제점이 있었다면, 그러한 문제를 방치해 온 문화재관리국도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사회에 밝혀야 한다.

전문인력의 수혈 시급

문화재전문위원의 양적 확산만이 능사가 아니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명예직에 불과한 전문위원제도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문화재관리국은 문화정책을 주는 ‘시혜자’라는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화의 민주화는 함께 가는 ‘열린 정책’에서 나오며, 열린 정책은 국민 정부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규제를 풀고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는 국민의 정부의 기본 정책을 무형문화정책에서만 따르지 않을 별다른 이유가 있을까.

정권교체가 없는 가운데 수십 년간 일정한 인맥이 국가적인 정책에 개입했다면, 마땅히 인적 교체가 이루어져야 하며 필요하다면 책임도 물어야 한다. 국가파시즘에 의한 ‘국풍80’ 같은 무형문화재정책은 그 동안 어떤 인물들이 무형문화재정책에 동원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지금은 개혁의 시대이면서도 화해와 협력의 시대이기도 하다. 정부에서도 전문인력을 수혈해 관료사회의 경쟁을 유도하려고 한다. 무형문화재정책 분야도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개혁을 마련해야 할 것 아닌가.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다른 것은 모두 차지하더라도 혹시 비법은 없었던가. 수년전에 터져나온 ‘수뢰’ 사건에서 보여지듯 많은 잡음이 끊이지 않음은 웬일일까. 유착관계의 위험성은 늘 예견할 수 있으며, 얼마전에 조직된 전통문화관련 NGO인 전통문화정책포럼에서는 그러한 부패관계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성장은 우리 사회 어느 분야에서도 결코 사태를 더 이상 방치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제도가 있는 법이다. 무형문화재제도를 속칭 인간문화재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문화재라는 말속에는 하나의 자기 함정이 있다. 분명히 국가에서 집행하는 무형문화정책이란 ‘기(技)’와 ‘예(藝)’에 관하여 지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어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이 여러 이유로 도저히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마땅히 지정은 취소되어야 한다.

지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수없이 거론되어 왔다. 가령, 전국 어느 곳에나 옹기쟁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느 특정 지방의 옹기쟁이만 지정될 필요가 없다. 지정방식에서 포괄성 없이 특정 인물을 지정하여 혼란을 자초하고 있다. 특정 인물만 지정됨으로써 오히려 잔존하던 다른 인물군을 소멸시키는 ‘이상한 결과’를 초래해 왔다. 마을공동체문화를 지정하면서 특정인물군, 심지어 문화와는 관련도 없는 지방유지를 지정하는 우도 범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지정 이후에 오히려 마을내의 갈등이 조장되고 공동체적 전승이 끊겼다. 민속예술 경연대회를 거치면서 시도예선, 전국본선 과정에서 ‘조작’ 연출된 놀이가 지정된 사례도 있다. 공예에서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이가 지정된 사례가 있다. 지금까지의 지정을 총체적으로 재검해야 마땅하다.

거꾸로 가는 인간문화재

일단 지정된 사람은 자신의 지정된 권위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계기로 삼아서는 안된다. ‘인간문화재’라는 잘못된 용어로 무장하고 비싼 수강료를 받으면서 실질적인 전수를 막아서는 안된다. 국가적으로 위임된 권위와 명예를 무기삼아 기능전수를 거부하거나 심각하게 제약하고, 후계자를 자신의 이해득실에 의해서만 이어나가겠다는 폐쇄성은 제도적으로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명예와 돈과 문화권력을 한꺼번에 특정 개인에게 주는 것은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없애 문화전승을 어렵게 한다.

자율만한 최고의 정책은 없다. 문화가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유도해야 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문화를 정책적으로 사고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의 기본 방침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국가에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들에게 ‘생계보조비’를 지급한다고 한다. 문화재법 어디를 들추어보아도 생계보조비란 조목이 없다. 일종의 불법이다. 사람에게 주는 생계보조비란 보건복지부에서 집행할 예산 개념이지 문화부에서 관장할 일은 아니다. 생계보조비 차원에서 지급되다 보니, 지정을 두고 혈안이 되어 이전투구가 벌어지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생계보조비란 정부의 지원책이 오히려 사태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무언가 잘못된 정책으로 나가가고 있는데 과감한 치료를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였는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거꾸로 이른바 ‘인간문화재’에게 국가정책이 발목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무형문화재에 속한 인물군들이 본인의 고귀한 기예와 무관하게 속류화되는 사태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만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좋은 의도로 지정했으나, 감독은 커녕 거꾸로 발목이 잡히게 되기까지, 관·민의 유착관계도 추측할 수 있다. 유착관계가 아니라면 관의 직무유기에 속한다. 자신감을 가지고 전환점을 모색해야 한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