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전세계에서 일어났던 68혁명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기존 관습의 대전환기를 마련한 68혁명에 대해 알고 있는 학생들이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중대신문에서는 68혁명 40주년 기념으로 68혁명에 대해 살펴보고, 오늘날 68혁명이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 의의를 되새기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세계, 관료·계급지배 비판 물결
소련, 프라하 봄 짓밟고 무력 침공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프랑스의 교외 공업지구에 위치한 낭테르대학. 열악한 교육환경과 권위적 규율, 수업내용에 불만을 품은 이곳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학생들은 대학을 점거하고 관료주의와 계급지배, 억압의 본질에 대한 토론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진압으로 수많은 대학들이 폐쇄되고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경찰과의 충돌은 5월 10일과 11일 바리케이트의 밤에 정점에 이르렀다. 경찰이 바리케이트를 습격하면서 청년들에게 가한 야만적인 행위에 국민들이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노동조합도 파업과 시위를 결의하게 됨으로써 학생을 넘어 전국민 차원으로 혁명이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은 권력과 위계, 기계에 대한 인간의 종속을 비판했다. 공장, 조선소, 정유소, 기차, 사무직, 은행, 유통업체, 우체국, 중등학교와 대학교 등 프랑스 모든 곳이 정지했다. 거리로 쏟아진 노동자와 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듀 드골!”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의 투쟁은 극장 출입 금지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경찰이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실업, 불평등, 국가 관료 지배층의 특권 등을 문제 삼으며 그 대안으로 ‘민주주의와 자주관리’에 기초한 ‘진정한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등록금 인상, 수업 방식, 시험 제도의 개혁 등을 요구하며 대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벌였고 열기는 전역으로 퍼졌다. 일본 도쿄대학의 정문에는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라는 말이 새겨진 마오의 대형 포스터가 내걸렸다. 의학부를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시위가 전개됐으며, 동료들에게 ‘기술관료-산업 복합체의 노예가 되기보다 ‘프롤레타리아 지식인’이 되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무릎 꿇고 살고싶지 않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권의 관료적인 보수정책이 계속되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자유화 운동이 시작됐고 1월 5일 마침내 개혁파의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를 역임하게 되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표방한 자유 민주화된 강령이 만들어지고 억압적 분위기가 풀리면서 5월 14일 사람들은 프라하에도 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구권 공산국가들을 의식한 소련이 무력 침공을 감행함으로써 봄은 일찍 시들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군 약 20만명을 동원하여 탱크를 끌고온 소련은 자유화운동을 저지하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했다.

그밖에 멕시코에서는 10월 개최될 예정인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학생들이 폭력 경찰 해체, 억압적 법률 철폐, 정치수 석방을 주장하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시위대는 50만명으로 불어나 경찰을 저격하고 버스를 불태우는 등 전투적으로 맞섰고 경찰도 강경하게 억압하여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인도에서는 낙살라이트 운동으로 수천명이 부패 정권에 맞서 저항을 시도했고, 브라질에서는 최초로 대중적 노동자 학생 운동이 시작됐다. 칠레에서는 파업과 토지 점거가 발생했고, 아랍의 알파타 무장 게릴라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장악하고 이스라엘 군대와 카라메에서 최초로 전투를 치렀다. 
 

전세계로 반전시위 확대돼
여성·흑인등이 새로운 운동 주체로

평화에게 기회를 제공하라

1965년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개시한 후부터 전세계에 걸쳐 수만명의 시위자들이 각 도시의 거리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각지의 미국 대사관과 정보부가 공격당했다. 이때 시위 구호들은 다음과 같다. “지금 당장 전쟁을 중단하라!” “이봐 존슨, 오늘은 아이들을 몇 명이나 죽였나?”

50만 이상의 미국 젊은이들은 징집 거부 운동을 실시했다. 베트남 주둔 미군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징병해야 했다. 학생들은 ‘학업 성과’를 증명하는 특별한 시험을 치르지 않고서는 이제 징병을 피할 수가 없었고 저항의 표시로 소집장을 불태웠다.

베트남전의 확대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백개의 대학에서 대중 집회가 열렸고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뉴욕에서는 항의 시위가 고등학교와 중학교까지 확산되었다. 시위에는 전체 학생의 60 퍼센트인 약 400만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참가한 것으로 추정됐다. 시위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코넬 대학에서는 꽃과 사탕을 발사할 수 있는 ‘평화의 탱크’를 만들었다. 코네티켓 대학 학생들은 꽃과 만화, 평화의 상징 그림으로 ROTC 건물 벽을 뒤덮었다. 

독일에서는 서베를린에서 루디 두치케의 주도로 1만명의 학생들이 반베트남전 시위를 가졌다. 9월 일본 도쿄에서는 1200명의 좌파 학생들이 다키나와 미군 기지를 습격했고, 주일 미군 확대에 핵심 요소였던 나리타 공항의 확장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농민과 학생 및 반전 활동가들이 연계하여 벌인 투쟁은 근 10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

사회 운동 내부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 권리를 찾기 위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애틀랜틱시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미스아메리카 경연대회가 중단됐다. 그녀들에게 미인대회는 남성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여성들이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인식됐다. 대신 상징적인 의미로 여성의 온순함과 굴종을 나타내는 브래지어, 걸레 등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남성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처럼 여성이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였다. 여성들은 가두시위행진에서 ‘우리들 억압의 상처에 분칠을 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었다. 그녀들은 일에 대한 남자와 동등한 권리, 낙태와 피임의 권리 보장, 보육시설 및 탁아소 무료 개방 등을 요구했다.

또한 흑인 인권을 위한 비폭력 투쟁을 지향했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자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 등 미국 전역 40개 이상의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분노에 찬 흑인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때려 부수고 방화하고 약탈했으며 이들을 제지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과 총격전이 난무했다.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다양한 조직들이 활동했는데 특히 블랙팬더당은 백인과 차별 대우하는 미국 경찰의 ‘경찰’을 자처하며 흑인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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