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한국 경제가 IMF 관리체제로 들어선 이후 대량실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른 고용불안과 실업문제가 전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정부 통계에서 제외되는 실망실업자, 무급가족종사자, 일용노동자 등 불완전고용층을 포함한 실질 실업자수가 이미 4백만 명을 넘고 있다는 점에서 대규모 실업사태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정부는 최근의 실업을 시장의 효율성을 위해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이며 따라서 규제 완화와 자본 이윤 운동 극대화, 사회복지 축소,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의해 고용창출이 촉진될 수 있다고 보며 이를 위한 여건을 마련하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 정부의 실업대책이라는 것이 실업발생의 구조적 요인에 대한 처방보다는 공공근로사업, 저소득층에 대한 생계비 지급 등 실업자에 대한 단기 생활대책에 머무르고 있는 점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대규모 실업과 이에 따른 고용불안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IMF 체제가 본격화된 98년 초 국내 노동조합은 고용안정과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나누기를 주요 핵심 투쟁방향으로 설정하였으며 현대자동차를 필두로 노동조합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 측은 근로시간단축을 통해 실업을 최소화하고 고용을 유지하기보다는 인원과 인건비 감축에 역점을 두는 실업발생형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안정 확보 및 생존권 사수, 그리고 전사회적인 총생산량에 대한 노동자의 개입을 통해 노동시간단축과 일자리나누기를 실현하는 것, 이를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구성원간 연대의 원리 실현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 여기에 노동시간단축투쟁의 의의가 있다.

IMF체제 이후 심각한 불황과 이로 인한 대량실업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에서 노동시간단축이 지니는 의의를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 의해 대량실업과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시간단축은 자본의 일방적인 고용조정(책임전가) 반대와 고용유지 및 고용창출의 기제의 의미로써 중요성을 지닌다. 둘째,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사회적 생산량에 대한 노동자의 개입과 생산성 및 진보의 과실에 대한 평등한 분배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지닌다. 셋째, 여전히 문제가 되는 장시간노동 극복 및 삶의 질 향상이라는 측면에서의 의의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1997년)은 취업자 기준 2천6백73시간, 피용자 기준 2천4백34시간이 이르고 있어 OECD 회원국 중 가장 최장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다. 또한 ILO 통계에 따르더라도 한국은 1996년 비교 대상 33개국 가운데 가장 긴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한국의 경우 현 경제상황 및 정세에서 요구되는 고용유지 및 고용창출의 의미 뿐 아니라 이러한 장시간노동에 대한 규제라는 측면에서 노동시간단축의 적극적인 의의가 있다. 넷째, 더욱이 여성노동력, 이주노동자, 장애인노동자들의 노동시장에서의 퇴출이 본격화되고 이들이 주변부 노동력으로 전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소위 주변부 노동력이라 일컬어지는 이들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실현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노동시간단축은 실제로 노동시장 전체, 경제 전체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즉 사회적 총생산량에 기초한 총노동시간의 배분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전사회적 수준에서 전국적, 획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이 기업별, 업종별, 기업 규모별 노동시간의 양극화(이중적 배분)와 격차를 완화시킬 수 있으며 노동자간 연대를 이룰 수 있다. 단축된 노동시간은 반드시 고용창출로 이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프랑스의 사례와 같이 국가의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상승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단축된 노동시간만큼 임금을 삭감하라는 주장은 현재의 경제위기 책임을 노동 측에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더욱이 최악의 생존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이 단축된 노동시간을 향유하지 못한 채 다시 새로운 직장을 구해 생계를 유지하게 되는 결과를 창출해 결과적으로 노동시간이 다시 늘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단축된 노동시간의 고용창출은 정규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현재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규제 및 불평등 완화를 위한 조치가 함께 취해져야 한다.

아울러 현재와 같은 대량실업 방지를 위해 전사회적 수준에서 법정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하며 이를 통해 고용유지 및 고용창출을 이루어야 한다. 법정노동시간단축은 당연히 임금삭감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시행될 경우 일자리 유지 및 창출 효과와 더불어 임금상승 효과를 가질 것이며 장시간 노동의 극복과 이를 통한 삶의 질 확보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노동시간단축에서의 관건은 초과노동시간이다. 이는 초과노동시간이 규제되지 않으면 실노동시간은 단축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초과노동 및 연간노동시간을 규제하지 않으면 경기 회복시 자본은 총 노동시간 범위 안에 현재의 인원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할 것이며 따라서 고용창출효과는 상쇄되어 버린다. 그러나 초과노동시간은 임금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초과노동시간 규제는 임금유지 및 상승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생산직 임금체계 개편을 통해 기본급 비중을 높이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이밖에 교대제 개선 및 주 5일 근무제 도입, 연월차 및 생리휴가 사용일수를 높이는 등 실노동시간단축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시행되어야 한다.

노동시간단축을 통해 발생하는 추가재원은 정부(고용안정기금을 포함한 공적 사회보장비 확충)와 자본이 분담하여 지출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회보장비 실태를 보면 한국의 사회보장비 지출수준은 1996년 기준 법정 퇴직금을 포함하여 총 20조5천6백25억원으로 국내총생산(경상 GDP)의 5.28%이며 이중 퇴직금을 제외하면 GDP의 3.88%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OECD 국가 중 멕시코를 제외하고 가장 낮은 수준이다. 특히 우리나라 국민들이 사회보장으로 받은 급여비중을 보면 법정 퇴직금을 제외한 실업급여가 0.05%이며 GDP 대비로는 0.0003%에 불과해 전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사회보장이 가장 낙후되어 있어 실업의 이중고가 겹칠 경우 안전망이 절대적으로 부재한 상태이다. 따라서 시간단축의 의의를 살리기 위해서나 경제위기에 대한 근원적인 처방을 강제한다는 측면에서도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추가재원은 정부와 자본의 부담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재벌재산의 환수,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 국가의 사회보장비 지출수준 확대 등을 통해 고용안정기금 및 노동시간단축 지원기금을 마련해야 하며, 자본의 경우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단축과 임금상승을 통해 추가 재원을 분담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삶의 질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며 시간의 가격 뿐 아닌 시간의 가치를 획득한다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조건을 뛰어넘어 실직자,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한 노동자 연대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노동시간단축과 일자리나누기는 업종, 지역, 산별을 넘는 전국적인 통일운동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99년 각 노조의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은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투쟁을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에 있다. 이미 지하철 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의 4월말 5월초 총력투쟁이 준비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조정 반대투쟁에서 노동진영은 노동시간단축을 적극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상급단체는 단사 차원으로 투쟁이 매몰되지 않도록 전사회적인 노동시간단축을 위해 전국적으로 집중된 투쟁전선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논리를 넘어선 실천투쟁을 조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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