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까마귀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2 전아리

찻잔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처녀속살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분홍 꽃잎이 겹겹이
붙은 채로 조심스럽게 봉우리를 펼친 모양새다. 넓고 속이 깊은 찻잔 안에서 말라비틀어진
차 이파리 몇 개가 잠자리날개처럼 몸을 풀고 떠오른다. 명희는 사과잼이 발린 쿠키를 내놓는다.
요새 아파트 여자들과 팀을 이루어 쿠킹강좌를 듣는다고 한다. 허기진 속에서 물이 괴는 듯한 소리
가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꿔 앉으며 쿠키 한 개를 집어 든다. 쿠키는 매우 달다. 명희
의 어린 아들은 간식거리가 웬만큼 달지 않으면 입에 대지도 않는다고 한다. 입안은 금세 건조해진
다. 나는 속이 따가울 만큼 진한 오렌지 농축액 주스를 마시고는 옆에 두었던 가방을 끌어당긴다. 죽
은 하마의 시체처럼 묵직한 가방의 지퍼를 열고 몇 권의 책과 비디오를 꺼낸다. 우주의 신비, 거북
의 일생, 나비의 비밀. 과학전집 중 가장 표지 디자인이 잘 된 것들을 늘어놓는다. 비디오 한 개 마
다 책 세 권치 다큐멘터리 영상이 들어 있어서 애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놨더라, 사진도 얼마나 예쁘
고 선명하니. 우리 애도 신기하다면서 몇 번을 봤는지 몰라. 나는 마치 함께 쇼핑을 하러 나온 친구
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권하듯, 과학전집의 책장을 생경한 것 만지듯 넘겨 보이며 설명한다. 빳빳하고
윤기 흐르는 책장에서 일부러 시선을 떼지 않는다. 책장에 인쇄된 것은 크레이터 자국으로 표면이 패
인 행성 사진이다. 여고시절부터 제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던 명희의 얼굴은 보나마나 뻔할 것이다.
얘, 화장실이 저기니? 나는 명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일어나 호들갑을 떨며 화장실로 향한다.
책장을 펼쳐 놓아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명희를 만난 것은 지난 여고 동창회를 마지막으로 삼 년
만이다. 펀드매니저라는 명희의 남편은 나도 잘 안다. 삼년 사이에 아파트 평수를 넓히고, 홈디어터
에, 와인을 좋아한다고 작은 스탠드바까지 얻은 명희의 삶에는 갓 지은 쌀밥의 따뜻한 온기와 반드
르르한 윤기가 돈다. 거품을 잔뜩 내어 손을 깨끗이 씻고 나오며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본다.
얘, 넌 어째 갈수록 젊어지니. 내 말에 명희는 가볍게 눈을 흘기는 척 하며 웃는다. 45권짜리 과학
전집과 15개의 과학 테이프를 일시불로 지불한 명희는 뭐 더 없느냐고 묻는다. 나는 샘플들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민망한 듯 웃는다. 남은 주스를마저 들이켜고 명희에게 묻는다. 너 혹시 보험든
건 있어?
딸애는 된장국의 두부를 건져 올린다. 두부는 밥그릇에 못 미치고 상 위에 떨어진다.
딸애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황급히 두부를 수저에 옮겨 밥그릇에 가져간다. 통조림에서 꺼낸
꽁치 토막을 발라 입에 넣으면서도 내 손을 곁눈 질한다. 제 젓가락이 내 젓가락에 얽히지 않도록
내가 집는 반찬 그릇을 피해 반찬을 집는다. 컵에 손을 뻗다가 나와 손끝이 닿자 소스라치며 물러난
다. 잔뜩 겁먹은 눈이 나를 바라본다. 화약이 터지듯 일순간에 열이 오른다. 나는 딸애를 노려본다.
딸애는 위험을 감지한 듯 발가락을 오그리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일곱 살인 딸애는 체구가 큰
편이다. 유난히 골격이 우람했던 남편을 닮은 것이다. 내가 눈치 보면서 밥 먹지 말랬지? 몇 번 말해
야 알아들어먹니? 왜 병신처럼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어? 목을 움츠리는 딸애의 볼을 손으
로 움켜쥐고 흔들어댄다. 출렁거리는 살집이 딸애의 얼굴을 더욱 미련해 보이게 한다. 볼 살에 붉은
자국이 남은 얼굴을 방바닥에 내팽개친다. 엄마 말이 말 같지 않아? 꼭 맞아야 사람 말을 들어? 나는
거실 바닥에 놓여있는 딸애의 리코더를 집어 든다. 딸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악을 쓰며 울어대
기 시작한다. 두려움과 분노가 섞인 울음소리는 내속에 잠들어 있던 작은 세포들을 터뜨리며 더욱
날카로운 열을 뻗치게 한다. 딸애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딸애는 구석을 향해 기어가더니 보
이지 않는 껍질 속으로 달팽이처럼 몸을 둥글게 만다. 조립된 리코더의 반 토막이 날아가고 딸애의
입술이 터져 작은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그제야 속에 일었던 불 바람이 한 풀 가라앉는다. 나는 리코
더를 팽개치고 숨을 고른다. 발뒤꿈치에서부터 뒤통수까지 뻐근한 피로가 올라온다.
이번 달 실적그래프는 나쁘지 않다. 자존심을 수수깡처럼 꺾어버리고 남편의 친구들
을 찾아가길 잘했다. 너무 청승맞게끔 보이거나 집요하게 굴어 지레 물러나게끔 만들지 않
으며 영수증에 사인하게 하는 데에도 능숙해졌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남편의 친구 중 한 명을 찾아갔다가 세 차례나 술자리를 갖고 그의 신세한탄을
들어줘야 했다. 마지막에는 여관 앞에서 손을 잡아끄는 것을 간신히 뿌리치고 돌아왔다. 물론 책과
비디오를 팔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번 달에 들어 적당한 동정표를 얻어 팔아낸 건수만 해도 세 건
이 넘는다. 어차피 볼 일 없는 얼굴들인 바에야 머릿수대로 현금 계산 해보라던 팀장의 말을 듣길
잘했다. 두 달 전부터는 팀장 몰래 보험 세일즈 일도 겸하고 있다. 남편에겐 친구가 많았다. 이혼수
속을 마친 뒤 함께 일본으로 떠난 여자도 처음에는 동성친구 못지않은 죽마고우라고 소개받았다.
콧잔등과 인중의 기름기를 눌러 닦고 파우더를 두드린다. 마스카라와 립스틱을 덧바르고 눈가에
아이 섀도를 문지른다. 파운데이션의 두께는 내가 느끼는 보호막의 안정성과 비례한다.
벨을 누른다. 인터폰이 작동하기도 전에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더니, 작고 뚱뚱한 남
자아이가 튀어나온다. 아이와 맞부딪치는 순간 안경 모서리가 가슴팍을 찌른다. 날카로운 통
증이 화살처럼 관통한다. 오마이갓, 아임쏘리. 아이는 안경을 벗어들고 눈가를 문지르며 내게 말한다.
뒤에서 2미터는 족히 됨직한 백인이 뒤따라 나오며 아이를 살핀다. 명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현관문 앞에 서서 아이와 과외교사를 배웅한다.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씩 과외를 해주는 외
국인을 따라 야외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딸애와 동갑인데 생일이 빨라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명희는 보험 팸플릿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다른이의 부탁으로 가입해 둔 보험이 두 개라고 한다.
우리 그이가 인정이 많은 편이야. 네 사정이야기 하니까 하나 들어주라고 하더라구. 그리고 사무실
로 한번 들리래 자기도 뭐하나 들어 준다고. 근데 난 보험 같은 거 들 때마다 기분이 좀 묘하다? 팔
부러진데 얼마 다리 부러진데 얼마 하면, 꼭 언제 닥칠지 모르는 내 불행에 값을 매기는 기분이 든
단 말야. 볼펜을 반듯하게 쥐고 계약서에 사인하는 명희의 손을 보며 희고 보드라운 식빵에 번지는
곰팡이를 떠올린다. 명희는 잠깐 손을 멈추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너 혹시 이번 주말에 바
쁘니? 우리 애 생일잔치 하는데 내가 만들 줄 아는 한식이 있어야지. 친구 애들 엄마도 모이는데 죄다
빵이랑 과자만 차려 놓을 수도 없고. 너 요리 솜씨 알아줬잖아.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인집 여자가 개를 안고 다가온다. 개는 이마 위에 난 털을 리
본으로 묶어 올리고 귀를 핑크빛으로 염색했다. 고무 슬리퍼 밖으로 보이는 주인여자의 발톱
매니큐어 색상도 핑크빛이다. 여자는 전세금이 올랐다는 말을 전한다. 엊그제 집주인 남자로부터 이
미 전해들은 이야기다. 주인남자는 내가 곤란해 하는 기색을 보이자 전세금 납부 기한을 미루어주었
다. 나는 여자의 품에 안긴 개의 턱을 간질여준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주인여자는 못들은 체 개를 제 품 안으로 더욱 밀착시키며 제 남편의 우유부
단함을 헐뜯는다. 애초에 정했던 기한에 맞춰 돈을 마련해 달라는 주인여자의 말에 애매한 표정을 지
으며 집으로 들어온다. 돈에 환장한 년, 천장에서 빗물이 시도 때도 없이 노망든 노인네 오줌 싸듯
질질 흘러대는데 전세금을 올려먹어? 제 남편을 욕해대는 꼴 보니 남편을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거 같더만, 평생 개 밑구멍이나 닦을 돼지 같은 여편네. 기억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씹어 뱉으며
스타킹을 벗는다. 스타킹의 밴드 부분이 닿았던 살갗에 화석처럼 울퉁불퉁한 자국이 패었다. 방에 있
던 딸애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인사하더니 도로 문을 닫는다. 나는 뻣뻣한 윗도리를 벗어던지
고 바닥에 드러눕는다.
벽에는 까마귀의 사진이 붙어있다. 언젠가 딸애가 나 몰래 과학전집 샘플에서 오려낸 사진이다.
그날 저녁 딸애는 응급실을 찾아가 팔뚝을 세 바늘 꿰맸다. 굳은살이 박인 복사뼈는 자두만한 크기
로 부어올랐다. 나는 서서히 딸애를 향한 폭력에 중독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딸애가 이상적인
방향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매를 들었다. 그러나 얇고 가느다란 회초리는 이내 주먹으로 바뀌었고 때에 따라선 굽이 닳은 구두나 머리빗이 되기도 했다. 머리빗으로 뺨을 얻어맞고 라면을 끓
여먹고 치워두지 않은 냄비 뚜껑에 발등을 찍힌 딸애는 두려움을 향한 본능만을 남긴 작은 짐승이
되어갔다. 엄마가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나는 열이 식을 때쯤 딸애를 향해 중얼거리곤 한다. 딸
애의 비명이 높아질수록 감정과 이성은 무중력 상태에 빠져든다.
까마귀는 길고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다. 몸통과 부리, 눈알, 발톱이 모두 검
은색이지만 제각기 다른 어둠의 농도를 띤다. 굽은 부리는 날카롭고 두껍다. 죽은 동물의 내
장을 파헤치거나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구정물에서 목욕하는 까마귀의 몸뚱이는 수십 가지의 색을 삼
킨 검은빛이다. 햇볕의 각도에 따라, 검은 깃털에 스며있던 유령들이 저마다 다른 빛깔로 비명을 내
지른다.
남편은 방 두개짜리 전셋집과 딸애를 남기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두고 간다고 말했다. 미안해,
그 여자 없이는 내 존재감조차 느낄 수가 없어. 남편이 말했을 때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그가
아침식탁 앞에 앉기 불과 5분전까지만 해도 전혀의심하지 못했을 만큼 평화로웠던 일상들이었다.
명희가 내게도 고깔모자를 씌워준다. 해피버스데이투유, 라고 적힌 고깔 끝에는 반짝이가 달려있
다. 치즈떡볶이와 김밥과 같은 분식들을 비롯해 갈비찜과 해물꼬치, 고기완자 등이 거실 가운데에 뷔
페식으로 놓인다. 미리 만들어두었다던 대형 생크림 케이크 위에는 명희 아들의 사진이 새겨진 얇
고 편편한 초콜릿이 꽂혀있다. 한 시 정각에 가까워지자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이 제 몸집보다 커
다란 선물을 하나씩 안고 찾아온다. 천장에 띄워놓은 헬륨풍선의 기다란 끈이 성가시게 얼굴에 와
닿는다. 요란한 생일축하 노래가 끝나고 모두들 줄을 서서 음식을 골라 담는다. 사진이 박힌 초콜릿
도 조각내어 나누어 먹는다. 나는 야구 글러브를 낀 아이의 손 부분을 녹여먹는다.
생일상을 치우고난 뒤 아이들은 놀이방으로 몰려가고, 엄마들은 거실에 앉아 티타임을
갖는다. 나는 양념이 진득하게 남은 식기들을 물로 헹구어 식기세척기 안에 넣는다. 명희는
과일과 쿠키를 내가며, 일은 나중에 하고 나와서 좀 쉬라고 말한다.
“내년에 큰애가 대학 다니는 시애틀 쪽으로 보내려고. 막내라 그런지 혼자 어딜 보내면 안심이
안되서 말이지.”
거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명희는 재빨리 준비해둔 간식 접시를 들고 나가며 대화 속에 끼어
든다. 우리 아들은 호주로 보낼 생각인데. 아무렴 유학 명소가 달래 유학 명소겠어? 사실 애 아빠만
허락하면 나도 같이 가고 싶어. 개수대 바닥에 덩어리 진 케이크 크림이 비계처럼 둥둥 떠다닌다.
과일껍질 때문에 하수구가 막힌 듯 하다. 부엌 창문을 통해 들어온 찬 바람이 손목에 스친다. 딸애
몫으로 덜어놓은 음식들을 쿠킹호일에 싼다. 초인종이 울린다. 거실에 모여 있던 여자들이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꽃다발과 금박지로 포장된 선물상자를 껴안은 명희의 남편이 들어선다. 백
합과 분홍 장미가 어우러진 풍성한 꽃다발은 명희몫일 것이다. 명희는 방금 전에 랩을 싸서 냉장고
에 넣어두었던 음식들을 도로 꺼낸다. 나는 촛농같은 기름이 떠 있는 미역국을 다시 데우고 그릇
들을 차례로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명희 남편은 천천히, 오랫동안 식사를 한다. 그는 옆 자리에 앉아
쉴 새 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아내에게 간간이 웃음으로 대꾸한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던 나는 그
의 눈빛이 이곳 아닌 다른 시공간을 향해 출렁거리는 것을 본다. 영업을 하기위해 사람들을 마주하
며 늘어난 것은 상대방의 표정과 어감만으로도 현재 기분과 생각을 감지할 수 있는 본능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핸드폰을 꺼낸다. 전화 목록을 훑어 내려가며, 발가락 한 개라도 딛을만한
여유가 보이는 틈새는 가차 없이 파고 들어간다. 이번 달도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적어도 두 건
이상의 보험을 성사시켜야 그나마 봐줄만한 실적이 나올 것이다.
딸애는 내복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마당에 나간다. 주인집의 열린 현관문 틈으로 개
가 뛰쳐나간 모양이다. 메리, 메리! 개를 뒤따라 나온 주인 여자의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몸이 노곤한 날은 잇몸부터 저려온다. 딸애가 먹다 남긴 닭튀김 부스러기가 방바닥 곳곳
에 널려 있다. 딸애가 열어놓은 현관문으로 찬 바람이 아귀떼처럼 몰려들어온다. 오늘은 화를 내거
나 머리칼을 잡아 뜯을 힘이 없다. 외투 주머니에서 낮에 받은 명희 남편의 명함을 꺼낸다. 최 병
일. 반듯하게 찍힌 이름 아래 펀드매니저라는 직업명이 영자로 박혀 있다. 오마이갓, 아임쏘리를 뱉
어내던 명희의 아들이 떠오른다. 딸애는 알파벳이나 읽을 줄 알까. 여섯 살 때 반 년 정도 유치원을
다니다 그만둔 뒤로 지금까지 줄곧 집에서만 지내왔다. 요즘은 한글은 물론이요 사칙계산과 기본 생
활영어정도는 다들 배우고 입학한다 하던데. 교실뒷자리에 비석처럼 앉아있을 딸애의 모습을 떠올
려 보던 나는 곧 진저리치듯 머리를 흔든다. 딸애를 낳은 시기는 봄이었다. 퇴원을 하며 둘러
본 병원의 담장에는 개나리 덩굴이 병원 안팎으로 쏟아지듯 드리워져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젖몸살
을 심하게 앓았다. 아이를 낳고는 한동안 냉이며 쑥 등의 날로 버무린 봄나물과 도토리묵만 반찬삼
아 먹었다. 갓난아이에게서 나는 젖내도 달고, 촉촉한 나물반찬만 씹는 내 입내도 달았다. 가장 행
복한 순간은 고무 함지박에 더운 물을 받아놓고 남편과 함께 아이를 목욕시키는 시간이었다. 따뜻
하고 여린 살갗을 조심스럽게 씻어내고 있노라면 평생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포만감 속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딸애의 이름을 짓기까지 보름 남짓 걸렸다. 작명소에서 지어준 이름들은 어딘가 한 구
석이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남편과 내가 밤새서 지은 한글 이름으로 동사무소에 등
록했다. 잠든 아이를 가운데 두고 누워 밤새 글자들을 조합하던 설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유
리문 밖으로 뜬 달을 바라보며 서로가 알고 있는 말들 중 좋을 뜻을 지닌 단어만을 골라 무수히 주
고받았다. 그러다가 우스운 이름이 오르기라도 하면 아이가 깨지않도록 서로 눈빛만 교환하며 소
리죽여 웃었다. 달착지근하던 봄밤의 한 자락 속에서 어느 틈엔가 노곤하게 눈이 감기던 잠자리는 따뜻
했다. 건물 로비는 부산스럽다. 건물내 커피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원두커피향기가 그 부산스러
움조차 고급스러워보이게 한다. 가방을 고쳐 매고 9층으로 올라간다. 명희 남편의 사무실은 복도 끝 쪽
이었다. 통화 중이던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복도 정 반대편의 휴게실로 나를 데려간다. 종이커피에
서 휘청거리며 솟아오르는 부연김 너머 그가 보험 팸플릿을 읽는다. 읽기 보다는 형식적으로 시선
을 걸쳐둔 것에 가깝다. 무어라고입을 열려던 그는 이내 잠자코 펜뚜껑을 연다. 혹시 주변에 보험 찾
으시는 분들 있으면 연락 주세요,꼭. 나는 콧잔등에 주름을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는 계약서를 작성
해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름을 갈겨놓은 서명까지 마친 뒤 점을 찍은 시늉을 하고는 종이를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식사 안하셨죠? 점심은 제가 살게요.”
나는 종이를 파일에 끼며 말한다. 그는 콧잔등을 지그시 누르며 사무실 쪽으로 돌아선다. 잠시 후 외투를 들고 나온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중국집은 넓고 깨끗하다. 흰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다가와 납작한 잔에 차를 따라준다. 한참동안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나는 해물짬뽕을 주문한다. 그는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은 채 새우볶음밥을 시
킨다. 식사 내내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는다. 그는 앞자리에 사람이 앉아있음에도 혼자 밥을 먹는 것
처럼 보인다. “여고시절에 어쩌다 같이 중국집 가면, 명희는 절대 자장면 안 먹었어요.”
내가 말한다. 그는 그제야 내 존재를 인식한다는 듯, 얼굴을 든다.
명희는 자신의 이상향으로 삼았던 여자 교생이 자장면을 먹고 난 뒤 검게 얼룩진 입으로 웃는 모
습을 보고 절대 자장면을 먹지 않았다. 파리 잡는 끈끈이 풀이 천장에 소 혀처럼 늘어져 있고, 플라
스틱 물 컵과 수저에 고춧가루가 붙어 있는 중국집의 분위기를 원래 싫어하는 편이었다. 낡고 지저
분한 가게일수록 유난히 음식 맛이 좋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취향이 달랐다.
“하긴, 주변에 식당 자체가 별로 없었어요. 학교가 변두리에 있었거든요. 명희에게 들으셨죠?”
그는 고개를 젓는다.
“ 동아리 얘긴 들으셨어요? 명희네 등산 동아리에서 매운탕 먹으러 갔을 때 일.”
그는 볶음밥을 한 수저 뜨며 아니요, 대답한다. 종업원이 다가와 그와 내 앞에 놓인 빈 잔에 차를
따른다.
딸애가 보이지 않는다. 주인집 여자는 메리가 사라졌다고 눈물범벅이 되어 우리 집 문을 두드린다.
남의 딸이 사라진 마당에 개새끼를 찾아 오열하는 모습을 보자 뺨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으나,
우는 꼴이 너무 흉측하여 문부터 닫아버린다. 기집애 들어오기만 해봐라. 나는 이를 갈며 상 위에 놓
인 딸애의 밥그릇을 집어던진다. 스테인 밥그릇이 냉장고에 부딪치며 식은 밥 덩어리를 토해낸다.
골목으로 나오자 어둠이 찰진 감촉으로 온몸에 감겨온다.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온 딸애의 이름이
시멘트 바닥 곳곳에 부딪쳐 부서진다. 예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땐 동네 친구 아이의 집에서 깜빡 잠이 든 바람에 늦었다고 말했다. 나는 딸애와 친한 동네 아이들을 잘 모른다. 여덟시가 다
되어 간다.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액정 위에 명희 남편의 번
호가 뜬다. 계약서를 작성한 당일에 취소를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의 눈매와 입가에 내가 당시
집어내지 못했던 치졸한 인상이 담겨 있었는지 되짚어본다. 타인을 다소 귀찮아하는 듯한 눈매에는
쓸데없이 사람을 불러내어 치근덕거릴만한 추잡함도 눈에 띄지 않았었다. 집으로 돌아와 진한 눈 화
장과 입술화장을 지우고 옅은 베이지 색으로 피부색을 얇게 덧입힌다. 집안일을 보다 나온 듯한 자
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식탁에는 식은 국이 담긴 냄비와 딸애 몫의 밥한 그릇이 놓여 있다. 이제 막 근육이 이완되려 하
던 발을 다시 구두 속에 집어넣는다. 뻐근한 통증이 발바닥을 타고 잔가지를 뻗는다.
안개처럼 탁한 칵테일이 앞에 놓인다. 얇게저민 레몬 한 조각이 잔 가장자리에 꽂혀
있다. 그의 몫으로는 맥주가 나온다.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여윈 촛불이 흔들린다. 웃을 때마
다 얇게 꼬리가 접히는 명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앉아있는 것일까, 잠
시 현기증이 인다. 그러나 이내 눈을 깊게 감았다 뜨고, 맞은편 자리 명희 남편의 흰 와이셔츠 깃을
본다. 그것은 신예 마술사의 주머니 속에서 나온 얌전한 비둘기처럼 희다. 그는 물방울이 맺히기 시
작한 맥주병을 골똘히 내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다. 온종일 숫자와 그래프 속에서 절여진 남자의 눈빛
에서는 막 뽑아진 인쇄종이 냄새가 난다.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다. 보험서류를 옆구리에 끼지 않고
사람을 만난 것이 얼마만인가.
“집사람이랑 오래 알고 지내셨지요.”
그가 무겁게 입을 연다. 나는 여고시절서부터의
시간을 셈해보며 웃어 보인다.
“그 사람 예전에는 어땠나요.”
그는 주식시장 거래동향을 묻듯 질문한다. 7층높이 창 밖 아래로 긴 고가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명희와의 시간을 되짚어보려 했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린 여고동창일 뿐 졸업
뒤에는 거의 만나지 않은 사이였다. 명희의 남편은 테이블 위의 벨을 수시로 누른다.
종업원이 오갈 때마다 술병을 새것으로 교체해준다. 그는 관자놀이 부근이 불그스름하게 번져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다. 나는 쉴 새없이 명희에 대한 이야기를 짜 맞추어 늘어놓는다.
상대편은 어쩐지 나를 쳐다보고 있음에도 내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는 듯 보인다. 속이 죄는 듯 답
답해져 찬물을 들이키고 싶을 때마다 그의 명함속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보험 홍보대상들을 떠올
린다. 두 시간 가까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건만, 계속 말을 잇기를 독촉하는 그를 보며 슬슬 기가
질린다. 첫인상을 잘못 짚어본 것일까. 웬만한 독종들보다 더 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서야 나 또한 술기운이 올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슬하게 남아있던 배터리
가 소진되며 핸드폰은 액정이 까무룩 꺼진다. 화장실은 네 벽면이 전부 거울로 되어 있다. 인맥을 통
해 알게 된 영악한 사람들은 보험에 들거나 과학전집을 구매하는 대신 내게 다른 종류의 거래를
요구한다. 나는 그들의 거드름을 경청해주거나 사적인 부탁을 들어주기도 한다. 번거로운 고객은 거
래를 끝낸 뒤 다시 뒤돌아와 찔러보며 사람을 떠볼 때도 있다.
자정이 넘어 밖으로 나왔을 때, 명희의 남편은 잠깐 휘청거렸다. 앞서 걷는 그의 양복
자락이 펄럭인다. 나는 술 냄새가 역류하는 숨을 고르며 멈춰 선다. 그가 택시를 불러 세워
나를 태운다. 그가 차 안으로 택시비를 선불로 지불하고 고개를 빼는 순간, 박하향의 스킨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뒷좌석에 몸을 묻자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은 듯 얼얼하다. 팔을 쳐들어 택시를 잡
던 그가 명희와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을때, 창백한 달빛이 그의 손등 위에 맨 살갗을 드러
내고 있었다. 그는 숨이 막힌다고 했던가. 차창 밖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가 온 몸이 저려오는 사람
처럼 몸서리를 치며 도로 반대편으로 멀어진다.딸은 현관문도 잠그지 않은 채 어두운 방구석에
서 잠들어 있었다. 식은 국과 밥이 그대로다.누군가 토악질을 한다. 나는 화장을 고치다 말고
문이 닫혀 있는 세 번째 화장실 칸을 흘끗 본다.굽이굽이 접혀있는 내장들이 전부 쏟아져 내릴 듯
깊은, 그러나 정작 게워내는 것은 없는 헛구역질이다. 옆에서 손을 씻던 사무실 여자가 비위 상한다
는 듯 손을 흔들어 털며 나간다. 화장실에서 나온것은 며칠 전 4팀에 새로 들어온 신참이다. 충혈
된 눈 주변이 척척하게 젖어 있다. 마흔 초반쯤 되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덤벼든 불행이 등을 떠밀
어 얼떨결에 사회로 튕겨 나온 여자의 모양새다. 조금전 팀장의 소집 지시로 사무실에 들렀을 때,
여자는 건물 지하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고무토막 같은 돈가스와 덜 버무려진 김치, 케첩이
번진 밥을 젓가락으로 허물어 먹던 모습은 입사초기의 나의 자화상을 보는 듯 했다. 여자는 찬물
로 입을 헹구고 코를 푼다. 여자가 자신의 표정에 뒤섞여 있는 나름대로의 절실함과 분노,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숙성시켜 삶의 도구로 인식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 명희.”
막 걸려온 핸드폰을 어깨에 낀 채로 사무실에 들어서려던 나는 멈칫한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는 푹신한 담요 위에서 자다 일어난 고양이처럼 나른하다. 일주일 전, 맥주를 들이키던 명희 남편
의 모습이 떠오른다. 명희는 보험료가 자동이체 되는 통장을 바꾸어 달라고 말한다. 나는 가방에서
메모지를 꺼내 계좌 번호를 받아 적는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흐른다.
“잘 지내지?”
내가 묻는다. 명희는 새삼스럽게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잔웃음을 내비친다. 그리고는 이번 크리
스마스 휴일에 남편과 강원도 온천에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황토성분의 노천온천인데 머
드팩을 할 수 있는 머드 풀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남편이 말도 없이 미리 예약을 해두고
어제 저녁에 알려주었다고 덧붙인다. 나는 적절히맞장구를 치고 전화를 끊는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는 4팀의 신참이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고쳐 매며나온다. 그러고 보니 사흘 뒤면 크리스마스다.
낮이 짧은 겨울은 마음이 불안하다. 오후 다섯 시가 넘자 거리에는 서서히 볕이 가시
기 시작한다. 남자는 약속시간보다 삼십분 늦게 나왔다. 커피숍 테이블 위에 놓인 팸플릿
들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그는 손을 깍지 낀 채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여관 앞
에서 덫처럼 손목을 쥐어 잡던 남자의 악력이 떠오른다. 나는 팸플릿을 펼치며 웃어 보인다. 메뉴
판에서 가장 싼 것을 골라 시킨 커피는 너무 달다.
“내가 암 보험이 필요허긴 헌데.”
남자는 경멸과 호기심, 지루함이 섞인 눈길로 천천히 내 얼굴을 훑는다. 때때로 타인의 시선은 한
숟갈의 염산 같아, 마주하고 있노라면 심장이 조금씩 부식되는 듯 하다. 나는 사무실에서 표본으로
제시해놓은 보험금 수령 사례들을 늘어놓는다. 그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간간이 후루룩 커피
를 마신다. 한 시간 가까이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던 그가 라이터를 딸각거린다. 그는 내게 술 한 잔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번들거리는 그의 이마위에 까맣게 원액이 남은 커피 잔을 내리치고 싶
은 충동을 참는다. 일그러진 표정을 들키지 않기위해 머리칼을 손질한다. 한 쪽 벽면의 수족관 속
에서 줄무늬 열대어들이 열을 지으며 헤엄친다.남자는 내 얼굴을 힐끔거리며 술잔을 채운다. 소
주병이 팸플릿 위에 놓이자 활자들이 부옇게 젖어간다. 창밖에는 진눈개비가 흩날린다. 마른 수건으
로 김 서린 창문을 닦아내던 아르바이트생이 술집안의 조도를 낮춘다. 벽에 붙은 조명 때문에 남자
의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보인다. 고춧가루를잔뜩 풀어 넣은 대구찌개는 밤과 함께 졸아붙는다.
나는 금세 취한다.술집을 나서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다. 시큰거리는 발목을 가누며 밖으로 나오자 눈발은 휴지조각처럼 굵어져 있다. 남자의 부축을 받아 빈 보도블록을 걷는다. 잠시 가로수 아래에 멈춰서 메마
른 기침을 토해낸다. 뱃속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활개를 치며 목젖을 박차고 입 밖으로 튀어 나
온다.
“방금, 봤어요?”
공중으로 날아오른 까마귀를 가리키며 남자에게재빨리 물으려는 찰나, 먹었던 것들이 식도를 타고
쓰라리게 쏟아져 내린다. 가지가지 허고 자빠졌네.남자의 목소리가 얼핏 귓가를 스친다. 그는 태아시
절부터 몸속에 고여 있었던 것 같은 가래를 뽑아올려 거칠게 뱉는다. 그리고는 도로변으로 내려가
택시를 기다린다.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각의 도로에는 차가 드물다. 남자의 뒤통수를 향해 가방을 집
어던진다.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를 돌아본다.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그가 내 멱살을 움켜쥐
더니 뺨을 후려친다. 나는 눈을 감는다. 숨을 들이쉬자 눈송이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편의점을 찾아 들어간다. 생수로 입안을 헹구고더러워진 손과 옷자락을 문질러 닦아낸다. 편의점
안에는 새벽 라디오가 흐른다. 급속충전기로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는 동안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를 듣는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졸음에 엉긴 목소리가 들려온다.나는 혀끝을 깨물며 숨을 죽인다. 이어, 누구냐고
묻는 명희의 목소리와 이불 서걱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린다. 상대방은 이내 전화를 끊는다.
명희의 침대에서 잠옷차림으로 잠든 나를 그려본다. 명희 남편과 함께 살갗을 맞대며 서로의 체온
으로 잠들고, 날이 밝으면 살찐 아들을 위해 영양가 높은 주스를 직접 갈아 만든다. 설탕을 듬뿍 넣
은 쿠키를 만들면서도 이따금씩 아들이 비만수치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수영이나 헬스를 등록시켜
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오늘은 다이어트 북과 에어로빅 비디오를 판매한다. 사무실 한 쪽 벽에는 사은품으로 제공되는
분홍색 에어로빅 복이 걸려 있다. 오늘은 노원구내의 아파트들을 순회할 것이다. 비밀번호를 입력
하여야만 출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아파트는 피하여, 아파트 내의 방문객처럼 자연스럽게 경비실 앞
을 지나쳐야 한다.
아파트가 마주보고 선 단지 내는 바람이 유독더 차갑다. 101동에 들어선다. 꼭대기 층인 15층에
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현관문을 훑고 내려온다.첫 번째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어려울 뿐 이
내 익숙하게 인터폰을 향해 인사를 건다. 사람들은 다소 신경질적인 어투로 사양하거나, 대답 없이 인
터폰을 내려놓거나 혹은 드물게 어디서 나왔느냐며 꼬치꼬치 캐묻기도 한다. 초인종을 두 번 눌러
도 반응이 없는 빈집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중년의 여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던 홋수와 젊은 자매가 함께 사는 홋수에서 나를 들여 상품 설명을 들었다. 중년의 여자들은 너
도나도 팸플릿을 집어가며 관심을 보였다. 누군가검은 스웨터를 들쳐 보이며 제왕절개 자국이 기묘
한 필기체 서명처럼 새겨져 있는 두둑한 뱃살을내보이자, 저마다 물주머니처럼 출렁이는 팔뚝과
허벅지를 내보이며 세월에 늘어진 몸매를 한탄했다.
아파트 두 동 째를 돌고 있을 때, 경비가 올라와 호통을 치며 밖으로 몰아낸다. 나는
경비에게 맞대어 욕설을 내뱉고는 아파트를 벗어난다.
빈 놀이터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누군가 모래에섞인 조개껍데기를 골라 한 쪽에 무덤처럼 쌓아
올려놓았다. 어둠이 치석처럼 끼어가는 아파트의 창문들을 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 차가 막힌다.
“유리엄마, 잠깐만.”
집주인 여자가 다가온다. 그녀의 품에는 못 보던 강아지가 안겨있다. 지난번의 개보다 작고, 털이
곱슬곱슬한 푸들이다. 여자는 집세 납부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돌아서려던 여자는
막 생각났다는 듯, 다시 말을 잇는다.
“유리 말이야, 나다닐 때 대문 문 좀 잘 잠그고 다니라 해. 오늘 낮에만 해도 이상한 사람이 들어
와서 기웃거리잖아. 열쇠도 줬는데 왜 그렇게 문을 활짝 열고 다닌데.”
집안은 어둡다. 냉기가 흐르는 방바닥은 깨끗하다. 식탁 위에는 젖은 행주로 훔친 물기 자국이 메
말라 있다. 딸애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보일러를 작동시키고 방바닥에 눕는다. 벽면에는 과
학전집에서 오려낸 수많은 종류의 조류들 사진이 붙어 있다. 쓸모가 없어진 전집 샘플들을 주었을
때, 딸애는 갓 지은 한복 받아들 듯 조심스럽게 책들을 받아 안았었다.
가방을 베고 누운 채로 눈을 감자, 종아리가 부레옥잠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실뿌리처럼 가닥가닥 찢어져 물 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아득해진다.
나는 한 그루 나무 아래 서 있었다. 눈 내리는 밤풍경 속에 오직 나무만이 흰빛이었
다. 나무껍질은 눈부신 결정들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사방은 고요했
다. 굵게 드러난 나무뿌리에 걸터앉았다. 영원히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평화로움이
찾아왔다. 그때 발치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목이 뒤틀린 채 죽은 까마귀였다. 하늘을 올려
다보자 손톱만큼 작은 공간의 어둠이 지워져 있었다. 죽은 까마귀를 나무아래 눈 속에 묻자, 나무는
검은 잎을 틔워내기 시작했다. 툭, 투둑, 툭. 죽은 까마귀 떼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갈증을 느끼며 눈을 뜬다. 아침 여덟 시가 다 되
어 간다. 번쩍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옆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딸애가 무언가를 감춘
다. 욕실로 달려가 황급히 양치질을 한다. 딸애가 수줍은 듯 상기된 얼굴로 다가온다. 맨발을 꿈지럭
거리며 기대에 찬 눈으로 등 뒤로 숨기고 있던 것을 꺼내 내민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색도화지로
포장한 작은 선물 꾸러미와 달력의 그림을 오려붙여 만든 카드다.
“엄마, 메리크리스마스.”
가슴이 저려오는 답답함을 느낀 나는 화장실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창문을 연다. 이제 막 부윰하게
밝아오는 하늘에 비도 눈도 아닌 것이 바람에 섞여 흩날린다. 곁으로 와서 선 딸애의 헝클어진 머
리칼 위에 눈발이 달라붙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잿빛 담장을 지난다. 낮은 담장 너머로는 기울어진
전신주가 내다보인다. 겨울바람에서 희미한 젖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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