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부정을 일삼던 자유당정권의 말기적 증상은 3·15부정선
거로 극한으로 치닫는다. 자유당은 사전 투표, 공개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선거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하지만 국민의 분노를 제압하지는 못한다. 마산에서의
규탄 데모 때 죽은 중학생 김주열의 시체는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깊숙이 박힌 채로 중앙동
앞바다에 떠올랐고, 동아일보는 그 사진을 17일자 사회면 톱으로 게재한다. 경찰은 그 다음
날 고려대생이 시위를 벌이자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2백 명이나 다치게 했고, 그 보도를 접
한 4월 19일, 전국의 학생과 시민은 독재정권 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내달린다.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그대들 가슴 깊은 청정한 부분에/고이고 또 고였다가/서울에
서 부산에서/인천에서 대전에서도/강이 되고 끓는 바다가 되어/넘쳐서는 또한/겨레의 가슴
을 적시는 것을,/1960년 4월 19일
-김춘수,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부분

서울 시내 곳곳에서 울린 총성은 1백99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많은 사람이 부상당하지만
학생과 시민은 맨주먹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다ㅡ. 이승만 정권의 하야 발표, 마침내 이
땅에서도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혁명’의 완수되는 것인가.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
의 전진이여!/우리들 아직도/스스로도 못 막는/우리들의 피 대열을 흩을 수가 없다./혁명에
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박두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부분

시인의 말대로라면 ‘혁명에의 전진’은 멈추지 않고 진행되어야 했다. 아닌게아니라 참의
원·민의원 총선거가 다시 실시되고 내각책임제에 의한 제2공화국이 수립되는 등 정계의 변
화는 즉각 가시화된다. 그러나 연이은 데모와 각종 폭력사태, 공직자의 부정에 민생고마저
겹쳐 사회의 혼란은 자유당정권 시절과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고, 이것은 몇몇 군인들에게
거사의 빌미를 제공한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장군은 4·19를 ‘학생
의거’로 평가절하하고 5·16을 진정한 ‘혁명’으로 명명한다. 박정희 휘하의 정치군인들
은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고 한일회담을 성사시켜 정치자금을 조달한다. 신동문 시인은 1963
년 4월에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며 쿠데타 세력에 의해 뒤집어진 역사의 아이러니를 애통
해 한다.

탐욕한 政商輩가/헐벗은 국토에서/또다시 아귀다툼/투전판을 벌이는데/너는 억울치도 않느
냐/내 조국아/더더구나/노회한 매국의 무리들이/민의를 가장한 플래카드를/서울의 복판에 내
저으며/민의를 혼란으로 우롱하는데/너는 슬프지도 않느냐/내 조국아
-「아아 내 조국」 부분

기본적인 재원을 확보한 제3공화국은 경제개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면서 보릿고개를 넘어
산업화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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