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순 동문 프로필

1960년 4월 1963년 2월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5년 3월 ~ 1985년 8월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85년 9월 ~ 1989년 12월 수원대학교 학(총)장
1989년 1월 ~ 수원대학교 교수
2005년 8월 계명고등학교장 취임

수상  
훈장 백마장, 교육 훈장

  대학교 수시합격을 했다며 기뻐하시는 만학도 아주머니와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학생회장이 같은 건물에서 정규수업을 받는다. 수원에 위치한 계명고등학교의 모습이다. 대학강단에만 40년을 섰던 이달순 선배가 돌연 고등학교 교장으로 변신을 꽤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명문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 목표인 고등학교 였다면 교장직 제의를 거절했을 거야. 계명고에서 입시위주가 아닌 여러 가지 교육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어”

명문대 많이 보내는 고등학교 였다면 교장직 제의를 거절했겠지”

  실제로 계명고는 오전에는 정규수업이 이루어지고 오후에는 음악, 미술, 문예, 체육, 봉사, 종교 등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이 주어진다. 한달에 한번은 명사가 초청되어 학생들이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된다. 연극인 손숙을 비롯하여, 농구선수 허재, 해병대 공보실장 등이 이러한 명사강연회를 거쳐갔다. 이달순 선배는 “교육이 망하면 나라가 망해.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은 모두를 망칠 수 있어. 사람마다 타고난 재주가 다를텐데 적성을 찾기위해 노력해야지”라며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교육 프로그램이 주목할만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교정에서 오가는 학생들의 두발이나 복장이 참 자유롭다. 이달순 선배는 “취임할 당시 한 말이 있어. 대학입시에서 밀려나고 정년기에 학교를 못다녔던 학생들이 계명고에 입학하지만 모두들 자유를 찾아 계명고에 왔다고 생각해. 그것을 존중해 두발자유화부터 실시 했어. 이제는 머리를 기르고 싶어서 입학하는 학생들도 생기더라니. 하하.”

진정한 교육자로의 재탄생

  그의 삶은 늘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는 삶이었다. 40년 동안이나 대학강단에 섰지만 선배는 단지 ‘지식의 전달자’로만 느꼈다고 한다. 강단에서 은퇴를 하자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진정한 교육자’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고등학교 교장이었다.

  중앙대 강단에도 섰던 이달순 선배는 중앙대 재학생이던 시절부터 조용할 날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학생회 활동을 하던 시절 중앙인이 화합하기 위한 하나의 구심점으로써  운동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축구부를 창설하던 당시였다. 다음날이 시합날이던 막 생긴 축구부가 운동장을 고스란히 사용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몸싸움이 났지. 모든걸 제치고라도 나는 다음날이 시합이 축구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 우연히도 다음날 축구부가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고 한다. “그때 우승을 시작으로 3년 연속 우승을 한 적이 있어. 그때 운동장 때문에 다툼이 있었던 사람들도 나중엔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을 하러 오더 라고. 하하.”
  중앙대에 재학생의 신분이 아닌 교직원의 신분으로 있을 당시에도 선배는 화합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했다 한다. “한번은 학교축제 때 정경대 교수들이 모여 학생들을 위해 청룡연못에서 합창을 한 적이 있었어. 교수가 학생을 위해 노래하는게 처음이었지 아마.”

어머니를 꼭 빼어 닮은 선배의 활동상

  이달순 선배의 활발한 활동상은 아마 당신의 어머님을 닮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달순 선배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씨다. 선배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여성의 사회진출 여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적극 지원하셨다고 했다. 여성으로서 최초로 부통령 후보에 2번이나 입후보한 임영신 여사와도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임영신 여사님은 홀홀단신 여성의 몸으로도 활동력이 대단했지. 그 분에 관한 사소한 물건들까지 현재 청룡연못에 있는 청룡상안 타임캡슐에 들어가 있어. 근데 그 사실을 아는 학생들이 많나?”라며 임영신 박사를 반추한다.

난 중앙대 귀신이 될줄 알았지

  “난 중앙대 귀신이 될 줄 알았어”라고 하시는 이달순 선배는 지금 다른 세상과의 인연을 맺고 있다. 하지만 중앙대의 후배들을 생각하는 애정 어린 마음은 변치 않았다. “억압된 현실에는 개척정신을 가져야해. 대학이 끝이 아니야. 사회에 나가서도 ‘중앙대생은 참 괜찮구나’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 학업에 충실한 것은 기본 이겠지만 자기계발에도 소홀해서는 안돼”라며 교육자로 살아온 40년의 말미에서 진정한 교육자가 되고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달순 선배가 당부의 말을 전했다.


◀ 대한민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선생님.

그의 다양한 활동은 최초의 여기자 였던 어머님을 꼭 빼닮았다. 그의 어머님이 그 시대 소외되었던 여성들을 위해 위해 노력했다면,
그는 대학입시 위주로 돌아가는 고등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 올바르게 사회진출을 하도록 돕고 있다. 이 모자는 매우 다르지만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계명고등학교는 입시명문고교는 아니다. 고교 입시에서 탈락을 했거나 다른 학교에서 적응을 못한 학생들이 마음놓고 웃으며 다닐 수 있는 학교다. 대학 입시만을 추종하는 삭막한 고등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을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그들은 낙오자가 아니라 적응을 못 한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적령 학령기를 놓친 어른들을 위해 2년간 6학기의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계명고등학교는 열린 학교다.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이달순 선배는 이 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중앙대와 수원대에서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쳤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 수업을 배우는 대학생에게 그는 지식의 전달자 이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을 느꼈다. 그 이후 그는 진정한 교육자로 거듭나고자 고등학교 교장직을 선택했고 지금은 많은 아이들의 꿈을 설계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원했던 진정한 교육을 그는 실천하고 있다. 그래서 이달순 선배는 오늘도 활짝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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