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협상 거부가 능사는 아니다


8월 31일 아프간에서 탈레반에 인질로 붙잡혔던 샘물교회 선교단들이 돌아오자마자 우리 정부는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잘못이다”라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우리 정부가 어떠한 경우에도 탈레반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엄정 대처’했어야 했다는 사건 초기의 주장이 다시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테러리스트에게 ‘엄정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한 사건에서 테러리스트와 협상할 경우 연쇄반응이 벌어져 다른 곳의 한국인들까지 납치 표적이 될 것이다. 둘째,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쁜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가 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이 두 가지 근거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한국인이 분쟁지역에서 연쇄적으로 납치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주장은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세력들이 자신들의 목적(몸값, 정치적 요구, 포로 교환 등)을 달성하기 위해 주로 손쉬운 표적(이번 선교단의 경우처럼 전혀 보호되지 않는)을 납치하여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면 석방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고의 의미로 살해하는 패턴을 보인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납치는 그들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직접 협상을 하거나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계기가 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나쁘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경우에는 초기에 대리자로 내세웠던 아프간 정부가 실패를 거듭하여 직접 협상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 정부는 인질들이 하나하나 처형되는 동안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다”라는 주장만 반복해야 했을까? 아니면 전혀 준비되지 않았을 뿐더러 애초부터 능력 밖인 구출작전을 벌여 더 많은 사망자를 내야했을까? 아니면 비난을 견디고 협상을 벌여 인질들을 구해 와야 했을까?


게다가 우리는 지금 당장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이라크 북부며 레바논에 ‘국익을 위해’ 상당한 병력을 파병하고 분쟁지역인 나이지리아 등지에 기업이 들어가 ‘비지니스’란걸 벌이고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예전보다 더 많이 테러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다!” 라고 외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용감하고 당당해보이겠지만 실은 우리 파병부대원, 외교관, 회사원, 진짜 구호활동가들의 사형집행장을 작성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선진국은 테러와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분들을 위해 첨부하자면 미국이 1980년대 중반 보수주의를 표방한 레이건 행정부가 자국 인질들을 구할 목적으로 이란의 이슬람 정권과 협상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이란에 자국산 무기를 팔아넘긴 이란-콘트라 사건의 사례가 있다. 이라크나 아프간에서도 여러 “선진국”들이 무장세력과 협상으로 인질을 구해내는 사례가 있다.


이 글은 이번에 표적이 된 샘물교회 선교단을 옹호할 목적이 전혀 아니며 우리가 앞으로 이런 해외에서의 납치와 협상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취지의 글이다.


이혁재/대학원 기록관리학과 석사과정

 

 


책장 사이에서
세계여행 떠나기

2007년 9월, 나의 대학생활 반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의 나에게 대학에서의 시간들이 남겨준 것은 학문에 대한 고찰이나 성장도 아니고, 소녀시절 꿈 꿔왔던 캠퍼스의 로맨스는 더더욱 아니다. 2년 가까운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에 ‘방법’ 따위가 있으랴마는, 사실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혼자일 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도, 혼자 수업을 들을 때도 나의 신경은 언제나 주변사람들의 존재로 인해 긴장상태다. 나의 귀는 나도 모르게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전화통화를 듣고 있고, 눈은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어색하게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먼 산을 바라본다.


특히 감기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감으려 할 때의 그 곤욕스러움이란. 머릿속에서는 ‘사람들이 아까부터 내 발을 쳐다보던데 아무래도 오늘 신은 구두가 이상한가?’, ‘내 앞에 앉은 저 두 남여는 수업은 안 듣고 뭐하는거야’ 등등의 잡다한 생각이 꽉 차있다. 혼자인 것이 혼자인 게 아닌 셈이다.


완전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서관에 자리를 깔아라.


도서관 책상에 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신문지 한 장 들고 도서관 책꽂이 사이 명당을 찾아 바닥에 앉으라는 것이다. 참고로 본인이 선호하는 구역이 몇 곳 있지만, 명당 중에서도 명당자리는 기행도서가 가득한 900번대의 자리이다. 한 두시간의 공강쯤이면 런던도 다녀올 수 있다. 전화를 하는 사람도 없고 내 신발을 쳐다보는 사람도 없다. 완벽한 혼자가 되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번주 프랑스 여행이 끝나면 다음주부터는 이탈리아에 다녀올 생각이다.


화려한 싱글로!


이아영/문과대 사회학과 2 

 

 

컴퓨터실
에티켓 바로 잡기

날씨가 참 신선하다. 바람도 상쾌하고 하늘도 높아진 것이 영락없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북적이는 학우들 틈에 조용하던 학교도 활기를 되찾은것 같아 내심 설레기도 한다.


도서관과 컴퓨터실도 개강을 맞아 새학기를 준비하는 학우들로 분주해졌다. 그런데 방학동안 우리들의 에티켓이 많이 약해진것 같아 안타깝다. 특히 법학관에 마련된 지하 컴퓨터실의 경우 자리를 맡아놓고 장기간 출타하는 학생들이 유독 많아졌다. 그들은 가방과 필통을 모니터 옆에 둔채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돌아올 줄을 모른다. 외출하며 두고간 핸드폰의 진동소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안 그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걸까?


벽에 붙은 주의사항에는 15분 이상 자리를 비울 경우 자리정리를 하게 되어 있지만 이는 이미 사문화 된지 오래다. 게다가 일부 학생의 경우 전화가 오면 그자리에 앉아서 통화를 하는 과감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가만히 자리에 앉아 인터넷 쇼핑을 즐기는 얌채족은 차라리 양심적이다.


모두가 공용하는 컴퓨터실을 개인이 점유하다 시피 하는 기이한 현상은 시정해야 마땅하다.


물론 컴퓨터실에 자치위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넓은 곳을 소수가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컴퓨터실 곳곳에 붙은 ‘주의사항’을 한번쯤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행합일’을 다시 한번 상기할 때이다.


최은순/법대 법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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