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행동에 자신의 내적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 상황을, 사회학에서는 ‘자기로부터의 소외’(alienation as selfestrangement)라고 말한다. 가령, ‘나는 사실 A라는 일을 하고 싶지만, 남들이 B라는 일을 더 알아주기 때문에 B를 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럴 경우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전혀 의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데이빗 리스먼(David Riesman)은 이런 사람을 ‘타인지향적(other-directed)’이라고 표현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처럼 타인지향적인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주인이고 싶어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거세당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자기로부터의 소외를 교육 과정에 빗대어 설명한다면, ‘나는 사실 A를 공부하고 싶지만, 남들이 B를 더 알아주기 때문에 B를 공부하는’ 상황이 그런 것일게다. 봉건적 도제 관계로 구성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바로 이런 상황을 빚어내고 있다는 사실은 왠만한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런 교육 과정에서는 학생이 자신 행동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교육의 부당성에 대응하는 ‘학습권’

이른바 학생의 ‘학습권’이 제기되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학습권이라는 좁게는 ‘자기가 배우는 교육 내용이 올바른 것인지 질문하고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권리’인 동시에, 이런 권리를 행사하여 ‘자기가 배우고 싶은 교육 내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며, 넓게는 ‘자신이 교육을 받는 방식과 교육의 여건 등의 제반 문제점들에 관한 해결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간단히 말해서, 학생의 학습권이란 인간 모두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요구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듯이, 학생도 자신에게 주어지는 교육이 부당하다면 그를 거부하고, 교육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며, 교육 자체에 대해 발언하고 개입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처럼 학습권을 정의한다면, 학습권이란 교육에 관한 학생의 자기결정권(자치), 혹은 자율성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라면 모두 다 학습권의 획득과 유지에 찬성할 것이다. 자신의 자기결정권과 자율성을 타인에게 양도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학생이 이런 학습권을 원할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교권은 인정, 학습권은 부정하는 모순

이런 상황이 빚어지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현행 교육 관련법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교육법은 교수의 권리(교권)는 인정하지만, 학생의 권리에 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여러 교수들과 학생들의 인식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다.

즉, 아직까지도 봉건적 도제 관계에 익숙한 교수들과 학생들은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가 언급한 ‘은행저축식 교육’(학생들은 지식의 예탁소가 되고, 교사가 지식의 예탁자가 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이다. 즉, 교수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가르침을 받는다는 수동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적극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학습권의 행사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학습권 수호 움직임과 확보 방안

대학가에서는 지난 1994년부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런 학습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교육부는 수업 평가제를 도입해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받은 교육 내용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르친 교수에 관한 평가까지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으며, 학생들은 ‘제2대학,’ ‘반(反)대학’ 등과 같은 실험 교육을 통해 자신들 스스로가 배우고자 원하는 내용을 직접 결정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시도들 역시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평가는 생략하고, 학생의 학습권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먼저, 학습권을 대학 내에서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당 대학 내의 역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단기간 내에 교육 관료들로 하여금 교육법에 학생의 학습권을 분명히 명시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 가능성이 없다면, 해당 대학 당국으로 하여금 이를 학칙에 명시하도록 강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대학 사회, 특히 교수 사회의 생리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학생들이 A라는 내용을 교육받고 싶은데, 해당 대학에 A를 전공한 교수가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만이 남는데, 하나는 A를 전공한 교수를 새로 임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공자가 아닌 교수에게 A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경우,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전혀 실현 불가능하다. 각 학과에는 전임 교수의 자리(이른바 TO)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교수를 받아들이게 할 만큼 교수 사회가 개방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전공이기주의에 매몰된 어느 한 교수가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가르칠 수는 없고, 그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학 당국을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는데, 이를 위해서는 해당 대학의 편제(가령, 교수들의 인맥이나 성향, 최종 결정 과정의 절차)를 잘 인식해, 그 약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단 가능한 한 가지 방식은, 교양 필수 이수학점 중의 일부분을 제2대학이나 반대학 같은 외부 강의에서 받는 학점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양과목의 일부분을 학생들 주도로 개설(가령, 학생들의 교육 내용과 교수 선택권, 그리고 학점의 공식적 인정)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편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특정 교양 과목의 개설 여부는 각 대학 전임 교수들이 자신의 인맥을 안정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기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습권을 궁극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공 과목에 대해서도 학생들의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 교수들과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렇다고 특정 교수는 능력이 없다느니, 어용 교수라는 식의 항변에 기반해 바로 그래서 학생들이 전공 과목 개설권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할 수는 없다. 당국 눈치보랴 학교 눈치보랴, 연구 업적은 붕어빵 찍듯이 제출해야지,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는 안정적인 연구 생활을 할 수도 없지, 우리나라 교수들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맘 약해지면 안된다).

대학이 ‘졸업장 공장’이 아닌 이상, 학생들도 자신이 공부하고픈 내용을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전공일지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전공 과목에 관해 교수들과 학생들이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어야 한다. 물론, 학생은 배우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관심사를 키우는 방식으로 배워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학문의 발전도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이런 자리가 어떻게 가능한지는 대학 구성원들 간의 지난하고 성실한 토론 과정만이 말해 줄 것이다.

학습권은 대학개혁의 키워드

어떤 점에서, 학생의 학습권은 우리나라 대학들의 개혁이 전제되어야만 그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학습권은 대학 개혁의 키워드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한 개인의 전인적 성장에 놓여 있다면, 교육 과정 역시 이를 원할히 획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학생들은 교육 과정에서 주인으로 올곧게 설 수 있으며, 졸업 후에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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