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이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연출한 영화는 1972년에 발표된 <화분>이었다. 한 가족의 몰락을 통해 당시 만연했던 한국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했던 <화분>은 고도의 은유와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 방식이라는 언론의 호된 질타와 함께 청룡영화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다음 해인 1973년 가족의 억울한 죽음과 복수를 다룬 영화 <수절>은 20분이 삭제된 채 상영되었다. 당시 유신정권의 횡포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수절>에 대한 검열은 이후 하길종이 감내해야 할 국가폭력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4ㆍ19 혁명의 참여세대이면서 5ㆍ16 쿠데타로 인한 굴욕적 좌절을 겪은 하길종에게 있어 영화는 사회적 비판과 저항을 영상으로 발언해야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1975년에 발표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을 대중에게 알리는 대표적인 영화가 되었다. 유신정권 하에서 보편적 대학생이 겪는 방황과 좌절을 최초로 담아낸 <바보들의 행진>은 일약 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로 기록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길종의 외로운 영화순례는 사전검열이라는 국가폭력을 피해갈 수 없었다. 5회의 사전검열을 통해 무려 30분 분량의 내용이 잘려나간 것이다. 더욱이 영화 삽입곡으로도 유명했던 ‘왜 불러’와 ‘고래사냥’은 이후 시대조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1976년『영상시대』라는 동인지를 통해 한국영화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지만, <여자를 찾습니다>(1976)와 <한네의 승천>(1977)의 연이은 흥행참패는 하길종에게 있어 중대 결정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검열이라는 현실과 영화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상의 간극 속에서 영화순례를 지속해야 할 새로운 명분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대중적 흥행에 성공한 <속 별들의 고향>(1978)과 <병태와 영자>(1979)는 영화적 재능을 주변인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자신의 영화적 이상을 지키고자 선택한 일종의 타협이었던 것이다.

유신정권의 광폭한 검열의 폭력 앞에서 많은 영화인들은 검열에 걸리지 않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하길종은 외부의 탄압이 거셀수록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 사후 발견된 유품중의 하나인 영화 <태인 전쟁>의 시나리오는 검열의 가위로도 막을 수 없었던 하길종의 영화순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이 시나리오는 귀구 후 9년 동안 수많은 부침 속에서도 하길종 스스로 준비해온 것이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억척스러웠던 그의 영화순례는 유신정권의 암흑기를 비춘 한줄기 빛이었다.

김성일(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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