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구를 대표하던 그가 모교로 돌아왔다. 바로 허재, 강동희와 함께 ‘허·동·만’ 트리오의 한 축으로 기아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김영만씨다. 지난 13일 전주에서 KCC-동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고 중앙대 농구부 코치로 돌아온 그를 만나봤다.

‘사마귀 슈터’ 마산고 시절 기자가 붙여줘

그의 이름과 함께 따라다니는 것은 ‘허·동·만’트리오만이 아니다. 바로 ‘사마귀 슈터’이다. “마산고등학교 시절 한 기자분이 지어주신 거예요. 아마 사마귀 같은 슛 폼으로 던지면 들어갔으니 그런 별명이 붙여졌나 봅니다”며 자신의 별명유래를 설명해주는 김영만 코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에게 가장 기억 깊숙이 남아있는 경기는 무엇일까. “97-98 프로농구 현대와 7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준우승에 그친 경기죠. IMF여파로 모기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선수들 모두 꼭 우승을 차지하고 싶어 했는데 결국 트로피를 놓쳤죠”라며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본다.

김영만 코치를 흔히 SF(스몰포워드)의 교과서라고 부른다. 정확한 슈팅능력과 돌파력, 이와 더불어 문경은, 우지원 등 당대 최고의 슈터들을 꽁꽁 막아내던 뛰어난 수비력의 그였다. 그의 이런 능력은 타고난 것일까. 마산고 시절까지만 해도 그의 원래 포지션은 센터였다. 그러나 중앙대 입학 후 포워드로 전향하게 된다. “2~3년 동안 고생했죠. 처음엔 3점 라인에서 슛을 던지면 링에 닿지도 못했는데…” 오전, 오후 훈련이 끝난 뒤, 텅 빈 체육관에서 수많은 시간을 혼자 연습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 그가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봉섭 전 농구부감독 가장 존경

은퇴경기 뒤 수많은 인터뷰에서 그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정봉섭 전 농구부 감독을 꼽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 뿐만 아니라 중앙대 농구부 출신이라면 모두 존경한다고 꼽는 분이죠. 농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분으로 농구 외적으로도 성실하고 건전한 생활을 강조하셨죠” 겸손이 배어나는 그의 눈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이 묻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대선수 역시 꿈같던 대학시절이 있었다.

대학시절 마산고에 비해 좋았던 중앙대를 설명하며 당시 체육관 바로 옆에 있던 숙소에서의 동료 선수들과 지냈던 추억들도 얘기하는 김영만코치.
다 큰 자식을 걱정하는 것이 부모마음이라고 했던가. 눈여겨 본 선수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며 지난해 농구대잔치 우승 등 정상에 있는 농구부에 대한 의견을 밝힌다.

큰 꿈을 갖고 노력하라

KCC로 트레이드 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은퇴를 선언해 아쉬운 점은 없는지 물었다. “25년 동안 농구를 하면서 목표가 있었는데 우승을 한번 밖에 못했고 원하던 농구를 선수 말년에는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영만 코치는 선수시절 00-01시즌까지 경기당 평균 20득점을 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스몰포워드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후 고질적인 부상의 후유증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후배들을 위해 프로에서 배운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김영만 코치는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꿈을 프로팀 감독이라고 말했다.

농구선수로서 모든 것을 이룬 그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큰 꿈을 가지고 노력해라’다. 프로가 되면 부와 명예는 따라오는데, 프로가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할 요즘 대학생들에게 이런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진정한 프로의 말을 우리 모두 새겨봐야 되지 않을까. 진정한 프로의 말을 되새겨봐야 하는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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