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괴물>, <미녀는 괴로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영화들은 장르도 주제도 모두 다르지만 각자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관객들로 하여금 지금의 사회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 작품이다.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여가생활의 일환이나 재미를 위해서 선택하지만 의외로 아무 생각없이 선택한 영화에서 영향을 받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낀다. 같은 이유로 과거의 영화는 작품성을 막론하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난 13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학술상영은 국군홍보영화 <배달의 기수> 시리즈 5편을 통해, 당대의 정치권력이 국민에게 어떠한 사상을 심어주려 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자리였다.


흑백 스크린 속. 엄마의 손을 잡은 남자아이가 군인 아버지에게 찾아가 한국전쟁 당시 어린 시절의 아버지 이야기를 듣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아빠의 어린 시절>은 국가가 그리는 이념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민군은 여자들을 위협하고 어린아이들의 목숨까지 전쟁의 노예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며, 국군은 영웅적인 작전으로 이들을 구해준다. 국군에게 구출 된 어린아이는 성장 후, 다시 군인이 되어 아들에게 추억을 들려준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머니는 어린아이와 같은 위치에서 아버지의 전쟁기억을 함께 듣는 위치에 머무른다.


<병사와 어머니>에서의 어머니의 모습은 좀 다르다. 어머니는 전시 중 휴가 나온 아들을 다시 전쟁터로 돌려 보낼 정도로 강인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아들은 전쟁터에서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지지만, 평소 어머니의 소망대로 전쟁터로 나가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구출한다. 이처럼 전쟁에피소드에서 여성성은 남성에게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 또는 강인한 어머니의 두 가지로 양분된다. 이날 영화를 관람한 박주원씨(이화여대 사학과 2)는 “국가가 일상에서와 전시상황에 여자에게 다른 성적역할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다. 여자군인에게 강한 여성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꽃꽂이와 미용 규범까지 익혀야 한다는 식의 영상물은 불쾌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배달의 기수>는 1970년부터 89년까지 매주 공중파 TV를 통해서 방영된 국군홍보영화지만 단순히 국군을 홍보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김한상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램 담당자는 “국가는 영화 속에서 일정 남성성과 여성성을 반복적으로 주입하여 산업화, 근대화에 편리하도록 국민성을 변화시키려 했다”며 국가가 동원된 주입 행위를 비판했다. 1970년대는 한국영화의 암흑기라 불릴 정도로 제작환경이 어려운 시기였지만, 정부자금을 동원해서 만든 국군홍보영화는 어느 수준의 작품성까지 갖춰 매우 활발히 제작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국민들은 6·25전쟁 때 맞서 싸운 적이 동포가 아니라 야만인같은 인민군이었다고 믿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들은 기꺼이 전쟁터에 나가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여겼다. 여성들은 약한 존재이지만 어머니는 시덥지 않은 감정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생각들이 국가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내면화된 것이라면 어떨까. 국군홍보영화 <배달의 기수>를 보고 지금까지 생각해 온 남성성, 여성성에 대해 의심해 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현재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진상은 기자 jse85@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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