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을까? 사실에 대한 말은 있지만 질문도 없고 대답도 없다. 최루탄으로 얼룩진 눈동자, 휴강 연속의 교정에서 책보다는 투쟁에 더 많은 시간들을 보냈던 선배들의 졸업식이 왜 자랑스럽고 평온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모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86년도에 졸업한 나는 동기들이 취업을 하지 못하여 고통한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했다.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오늘에는 민주화가 되지 않은 고통보다는 미취업으로 인한 고통이 문제로 다가왔다. 대학생이 특권층이 되었던 그 시절에는 비록 대학에서 학문에 보낸 시간보다는 다른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로 인하여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취업에 제한을 느끼지 않았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었고 기회였다. 민주화는 그 권력의 실체를 무로 돌려버렸다. 대학생들이 자신들을 민주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제는 대학생도 공부하지 않으면 공무원시험에서 고졸 출신들과의 경쟁에서 결코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없다. 최루탄으로 얼룩진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이것을 물려준 것이다.

특권은 없다. 각오하라.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영문을 모른 채 대학에 들어왔고, 더 무시무시한 경쟁을 치루어야 한다. 그래서 졸업이 불안하고 기쁘지 않다. 그래서 나는 IMF으로 인한 실업대란과 청년실업의 문제가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질은 대학생들이 스스로 누리던 모든 것들을 던져 버린 발가숭이 지성인들로서 세상을 헤엄쳐 가야 한다는 시대의 요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사는 평면적이다. 그러나 역사는 깊고 오묘하며 모순과 모순이 얽혀있는 드라마이다. 시위와 경제파탄, 실업의 상영관 뒤에서 더 큰 힘으로 역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손을 보는 것이 저널리스트가 아닐까?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에 부역한 프랑스의 기자들이 처형당한 것은 그들은 신뢰를 배신한 죄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어를 다루는 사람은 혀와 손을 잘리 울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감히 세상에 뜻을 펴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널리스트의 글은 사람의 정신이라는 사원에서 성사(聖事)를 베푸는 언어의 사제(司祭)이기 때문이다.

이재하/1캠 교직원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