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쿼터, 진정 자주적 문화시위인가

우리 것 지키자? 글쎄요…

사회대 무역학과

김준영

‘스크린 쿼터’라는 단어를 접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영화배우와 감독들의 스크린 쿼터 반대 1인 시위 장면이다. 인기 영화배우 1인 시위 소식에 광화문을 꽉 매운 사람들. 월드컵보다도 더 뜨거운 사람들의 함성과 몸싸움은 마치 실제 경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러한 모습을 피상적으로 보면, 그들의 시위와 그들이 말하는 현행 스크린 쿼터 유지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만 같다. 여기서 질문이다.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줄 부분은 어디일까. 한국 영화 1천만 명 시대를 열었지만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단편․독립 영화들의 설 자리는 확보되어 있는가. 스크린 쿼터 반대 1인 시위는 그저 언론에게만 좋은 ‘꺼리’를 주고, 스타들의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했던 그들만의 잔치로 보여진다.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그 심각성은 영화인들에게 먼저 맞닿아있다. 자신이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까지 반납하고 반대시위를 펼치기까지 하는 스크린 쿼터란 대체 무엇인가. 극장이 자국의 영화를 일정기준 일수 이상 상영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 국산영화 의무상영제라고도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스크린 쿼터는 국내 영화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일종의 방패막이라고 할 수 있다. 스크린쿼터 유지는 애초 정부가 찬성한 문화다양성협약에 근거를 두었다. 영화 같은 문화상품은 물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이 개입된 산업이기 때문에 일반상품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반상품은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것만 골라 사면 그만이지만 문화산업은 철학과 가치관을 바꿔버릴 정도로 정신에 심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거 스크린쿼터 시행은 미국식 문화식민지에 대항하고 자국의 영상산업을 발전시키는 큰 원동력으로 보여줬다. 때문에 정부의 말 바꾸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기운이 감돈다.

현재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80% 이상이 미국 할리우드 영화가 석권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스크린쿼터라는 화두가 한 가운데 자리한다. 한 예로 대만영화는 1980년대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며 황금기를 누렸으나, 1990년대 초 스크린쿼터를 폐지한 이후 몰락하여 현재 자국시장의 90% 이상을 할리우드 영화에 내어준 상태이다. 때문에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는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한 반문화적인 쿠테타이며, 스크린쿼터와 같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가운데 미국의 거대 산업자본과 경쟁을 강요하는 것은 재앙”이라고까지 주장하며 반대에 나선 것. 스크린쿼터가 줄게 되면 거대 자본을 앞세운 할리우드의 직배사들이 무차별 마케팅으로 공략해와 한국영화는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고사 직전, 비주류 영화에도 관심을

물론 객관적인 사례들을 볼 때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가장 노력해 온 사람들이 스크린 쿼터제를 지지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시장 점유율이 70%를 넘어가는 지금의 한국영화 득세현상에 대해서 ‘우연’ 혹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몽상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스크린쿼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스크린 쿼터를 주장하는 영화인들은 과연 이러한 주장을 할 자격이 있느냐 말이다.

스크린 쿼터를 주장하는 영화인들의 시위현장을 보도한 뉴스에 대해 누리꾼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스크린 쿼터는 논리상 옳은 말일 순 있겠지만 스크린 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태도가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한국 영화를 보호하자며 우리 것을 아끼자고 주장하는 영화인들의 옷차림은 온통 외국산 명품이었으며 그들이 타고 온 차는 수입차 일색이었다. 이래서는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스크린 쿼터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국민들도 공감하는 바이지만 이런 영화인들의 시위는 소위 자기 밥그릇 챙기기로밖에 비춰지지 않는 것이다. 한편 정말 한국영화를 사랑한다면 비주류 영화에도 눈길을 돌려줘야한다. 돈과 초호화 캐스팅으로 무장한 채 극장에 개봉되기만을 기다리는 메이저급 국내 영화들 앞에서 국내 비주류 영화들은 상영관 하나 확보하기도 힘든 것이 충무로의 현실이다. 그런 그들이 이젠 자기보다 훨씬 덩치 크고 힘 좋은 할리우드 영화들과는 경쟁하는 것이 공평치 못하다며 스크린 쿼터 축소를 반대하고 나선 것. 그러나 스크린 쿼터제가 문화다양성에 기여하기 보다는 가문의 위기나 투사부일체 같은 조폭 코미디 영화의 흥행에만 도움이 되는 듯한 우려가 앞선다. 진정 영화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상업성 짙은 국내 대형 영화들보다는 작품성 있는 국내 비주류영화에 눈길을 주는 제도가 더욱 시급할 때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흉내보다는 창조를…

얼마 전 부산국제 영화제 자원봉사를 함께 한 인연으로 알게 된 몇몇 지인들과 술 한 잔 기울일 자리가 있었다. 극장 개봉은 고사하고 그저 작품하나 완성하는 데에 의의를 두는 배고픈 영화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스크린쿼터에 대해 물으니 의외로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덩치 큰 할리우드 영화가 활개를 치지 않는다 한들 쟁쟁한 기업의 후원을 받은 충무로 영화 덕에 지금도 죽어나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 다수의견이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는 여우가 왕이 듯이 이제 호랑이가 맘껏 기지개를 펴려하니 여우가 죽겠다며 발버둥치는 모습이 지금 우리 영화계의 자화상인 듯하다.

스크린 쿼터를 주장하는 그들은 과연 그네들 영화보다 더 어려운 실정에 처해있는 국내 영화를 생각이나 해봤을까. 그저 진부한 스토리에 스타에 의존한 것이 요즘 국내 영화의 모습이다. 작품성 보다는 유명 배우들의 얼굴과, 돈이면 된다는 식의 홍보 전략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조폭들의 세계를 단골삼아 성적 웃음을 던져주는 것. 진정 국내영화가 해외시장에서도 경쟁력 있게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제고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다. 여태껏 물질이 아닌 정신이 개입된 문화산업이라는 영화를 보호하자면서 진정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들에게 만족할만한 다양성과 독특함을 보여주었는지 의문이다. 심심찮게 칼과 총이 난무하는 할리우드의 표상을 흉내 내는 영화나 일본 특유의 허무성을 표방한 영화 등을 재탕한 듯한 한국영화. 한국의 한국에 의한 그리고 한국을 위한 영화를 찾아갈 때, 제 아무리 할리우드 영화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영화 왕의 남자는 선혈이 난자하는 장면도 저질스러운 남녀의 정사신도 없었지만 국내 영화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외국으로까지 나아간 제 색깔을 찾은 한국 영화이다. 이제 조폭 가문과 조폭 아내를 내세우며 영화를 만들지 않더라도,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다.

“스크린 쿼터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리겠습니다.”, “스크린쿼터는 전 세계의 동막골입니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말아톤에서 엄마 손을 놓고 이제 막 스타트를 끓은 초원이와 같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저희의 꿈을 지켜주세요.”

영화인들의 1인 시위로 대표되는 스크린 쿼터 반대 문구. 누가 보아도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운 채, 시민들의 알 권리를 송두리째 뺏어가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크린 쿼터 축소가 아직은 때 이른 사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에 호소하는 문구를 볼 때면 왜 진정으로 스크린 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지 그 배경이 자못 궁금해진다. 그저 한·미 FTA를 위해 한국영화가 희생된다는 식의 신파극 같은 주장은 접는 것이 옳다. 영화인들은 이런 때 일수록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고집하지 말고, 하루빨리 촬영장으로 돌아가 또 다른 왕의 남자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드는 일에 땀을 흘리는 것이 어떨까. 영화를 문화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설픈 이념을 동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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