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______________주류이기를 거부하는 '개김'의 노래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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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신문사는 '하위문화의 방황 그 한계를 넘어서'라는 기획을 마련했다.이
기획에서는 기존에 지녔던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정신이 거세되고 있는 하위
문화의 문제점을 장르별로 지적한다. 아울러 산적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까지 모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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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몇몇 어두운 지하(언더그라운드?) 클럽(말이 클럽이지 사실은 좀 지
저분한 카페나 맥주집 수준이다)에는 주말마다 `젊은 아이들'이 모여든다. 그
중 몇몇 아이들은 기타 메고 드럼을 두들기고 소리를 지르고 다른 아이들은 거
기에 맞춰서 몸을 흔든다. 펑크의 저항 문화? 광란의 댄스 파티? 뭐래도 좋다.
아무튼 간에 이 `젊음의 해방구'는 95년경부터 홍대 앞에 둥지를 틀기 시작
했고 지금은 드럭, 재머스, 스팽글, 푸른굴 양식장 등 10여개의 클럽에 50여
개의 밴드들이 연주를 하고 있다.
그런데 20여 년 전 영국에서 일군의 연구자들이 자기 나라 노동계급-백인-남
자-청소년들의 스타일과 문화를 지칭하기 위한 말인 하위문화(subculture)라
는 말이 여기에도 붙게 되었다.그들의 연구를 보면 청소년 문화에서 락 음악은
그들의 정체성 형성 그리고 다른 집단과의 차별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
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문적 엄밀함에 강박되지만 않는다면 홍대 앞 클럽 공동
체를(세대 반항이든, 권위에 대한 반항이든 무엇이든) 하위문화라고 부르는 것
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클럽 공동체가 하위문화라는 담론과 만나면서, 그리고 그전부터 반짝하던
`저항으로서의 락' 담론과 만나면서 `무게'를 갖게 되었다. 90년대 초반부터
소개된 저항으로서의 락 음악 담론은 락 음악이 이미 활력을 잃어가고 있던 민
중가요에 대한 대안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했다. 락 음악이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이라는 주장은 논리가 부족한 것도 문제였지만, 더욱 비판받았던 점은 `
말만 있을 뿐 실체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연찮게 `발견'하게 된
클럽 밴드들은 90년대 중반 남한에서 `저항'의 담지자인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다. 하위문화가 저항적이고 정치적이라고 `관
념적으로' 단정하고나서 실제로 하위문화를 `견학'하러와서 `난장판'같은 모습
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가. "닥쳐/닥쳐/닥치고 내
말들어"(크라잉 넛, `말 달리자')라는 노래처럼 이들은 순응적이지 않고 관습
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한두시간 남짓한 클럽 공연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신
들의 쾌락과 욕망으로 채운다. 여기서 이들의 `저항'은 정치적 반대나 강령을
가진 것이 아니라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이다.
저항이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반항이나 `개김'이 더 적합한 말인 듯도 하다.이
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획일적이고 상업적 주류 대중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며 자신들만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다. 여기서 지배적 가치 체계는 `
상징적'으로 거부되며 전복된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적이지만 통상적인 의미에
서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그 정치는 정치가들이나 대학생들의 `동원의 정치'도
아니고, `의식있는' 회사원들이 즐기는 `술자리의 정치'도 아니다.
이 하위문화 음악 공동체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음악을 통
해 벌어지는 정치다. 이 하위문화 음악 공동체인 클럽에서는 `마구잡이'로 연
주하다보니 어느덧 실력이 붙은 밴드들도 나타났고, 남의 나라 곡만 베껴서 연
주하는 패들보다 자기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는 패들이 많아졌다. 동네축구단같
은 아마추어 밴드에서 시작하여 일정한 실력을 확보하여 자의식을 가진 연주집
단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저항의 담지자라고 흥분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하위문화에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주류 음악 문화(나아가서는 음악 문화 전체)에 대한 비판의 역할을 수
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락 문화는 이전에는 매니아 문화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기타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끌
만했다. 그런데 그 문화가 이제`안정화'되고 자리잡혀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럴 때 내재하는 위험이 있다.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만의 공동체 속에서
안주하고 자족하는 것이다. 하나의 관습으로 고착되는 음악적 매너리즘은 가장
큰 내부의 적이다. 그렇다면 `인디'건 무엇이건 `마이너'로서의 순경제적인 의
미 이외에 문화적(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위험은 `타자'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요즘 언론을 보면
하위문화 `출신'의 밴드들이 재미있고 신기한 별천지 인간들임과 동시에 자신들
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인간들로 소개된다. 갑작스레 언더그라운드 클럽 `출신'
의 가수가 하나 나타나 성공이라도 한다면, 하위문화는 스타가 되기 위한 수련
장쯤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거부의 형식으로서의 스타일(음악)이 `
덜 위험한 것'으로 변모하여 주류로 흡수되는 과정과 같다. 차이는 무시되고 조
금 신기하고 색다른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위험들을 염두에 둔다면 주목할 만한 시도도 보인다. 클럽 자체는 클럽-
밴드-팬의 재생산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개클련'(개방
적 클럽 연대)이라는 우스운 이름의 모임이 꾸려져 매달 클럽을 돌아가면서 합
동 공연을 기획하고 있으며, `인디'라는 이름의 인디 레이블을 만든다는 소식
도 들린다.
이미 클럽 드럭이나 재머스에서 독자적으로 인디 앨범이 나온 바도 있지만,
인디 레이블은 이들 언더그라운드 클럽 밴드와 청중까지 포함한 공동체들의 재
생산 기반이다. 이는 어렵사리 기획사를 통해 단발적으로 앨범 한 장 발매한
후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고 사라져버리거나, 극히 드문 경우 텔레비전의 스
타로 거듭나는 방식과는 다른 독자적인 네트워크의 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이들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메이저 리그'인 주류 가요판에 새로운 피를 공급하는
`마이너'로서 원만한 위치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
그'를 통해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오해에서 나온 과장된 기대와 실망도 아니며, 국지적이고 특수한
사운드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얼기 설기 끌어모아 잔치를 벌이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위험에도 불구하고 언더그라운드 내부의 움직임이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