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KOEX)에서 열렸던 SICAF '97(서울국제
만화페스티벌) 행사장에서 누구보다 바빴던 사람은 박재동이었다. 이 행사의
기획단장을 맡으면서 전시를 총 지휘한 그는 한편으로 KOEX 전시장 밖에서
벌어진 만화탄압에 대한 만화인들의 비상대책위원회 주관의 항의 서명작업과
작가사인회의 주도인물이었다.

만화가게집 아들에서부터 만화를 그려 온 그는 오늘날 만화가들 사이에서 가
장 열심히 활동하는 한국만화의 지킴이가 되었다. 일련의 정부의 만화육성정책
과 다르게 검찰의 만화통제와 단속은 그를 작업실 밖으로 나오게 했고 만화인
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을만큼 그는 대중만화가들과 시사만화가들 사
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사실 대중만화가와 시사만화가들이 이번처럼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어울린 적은 한국 만화사에 처음있는 일이다. 그만큼 이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묘한 경쟁적 심리가 있다. 이러한 갈등의 극복은 박재동이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아무튼 박재동은 카툰이든 애니메이션이든 만화장르의 확대와 대중에게 만화
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기여를 했다. 10년간 만화계에 있으면서 그가 이루어낸
업적은 무엇보다 만화사랑에 대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점이다. 그는 만화
와 만화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불식시키는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 만화
는 아동들의 소유이며, 그 영역은 매우 조잡하다는 편견, 만화인들은 아동들의
코묻은 돈을 벌어들이는 직업이라는 것, 시사만화는 꼭 정치적이고 슬금슬금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몰이해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박재동의 만화는 단숨
에 바꾸어 버린다.

1980년대가 문화폭증의 시대라면 이 시대에 가장 상승세를 탄 것은 만화였
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박재동과 같은 엘리트 모범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박재동은 시사만화가로 출발하였지만 그 이전 화가와 교사로서 대중만화에 대
한 관심이 깊은 탓에 시사만화라는 장르에 국한하여 활동하지는 않았다. 본인
스스로 대중만화가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대중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만큼
대중문화가들에게 박재동은 신선한 만화가로 다가와섰다. 주로 이두호, 이희
재, 김형배, 차성진 등 한국만화의 앞날에 대하여 모임을 갖고 `아카데미 강
좌', `한겨레 만화강좌' 등을 통하여 후학과 인재들을 양성하는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의 작가들이 그의 중심에 있고, 그 역시 우만연 대표로
서 2년째 활동중이다.

박재동은 사실 욕심이 많은 작가이다. 미술계에 있을때나 만화계에 있을 때
나 끊임없이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그는 여러권의 저서를 남겼고, 8년간의
한겨레 그림판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으며 신문만화에 `이야기성'이라는 독특한
그림마당 형식의 새로운 경향을 전파했다.이제 애내메이션 동네에서 감독으로
`오돌또기'를 만들어 가는 그에게 웬지 믿음이 가는 것은 그의 길이 결코 편
한 길이 아니었음에도 꿋꿋이 어려움을 이겨나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안
주하는 작가가 아니라 욕심이 너무 많은 작가로 평가된다.

곽대원<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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