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아닌가. 소설 『다빈치코드』는 문자화된 비주얼이었고 그래서 눈으로 확인하고픈 조바심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영화는 그 각자의 상상도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실현시켜 줄 모든 시각 예술의 총화로 보였다.

세간의 우려와 달리 이것은 예수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관객의 기대는 오히려 예술에 관한 영화이기를 편든다. 필요했던 것은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찬란한 시각 예술의 아우라였다. 영화야말로 글자들 속으로 숨어버린 ‘모나리자’와 ‘암굴의 성모’ ‘최후의 만찬’의 면모를 눈앞에 불러내 줄 주문이요 크립텍스였던 것이다. 

예수의 값어치는 얼마인가? 소설『다빈치코드』는 금기의 질문을 당돌하게 던졌다. 예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매개로 본격적으로 저잣거리로 나와 경매에 부쳐진 셈이다. 인류 2천년의 금기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상품성의 보고였다. ‘성배’는 어느덧 예수나 마리아 막달레나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신비한 상징이 돼버렸다.

열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암호는 또 다른 암호를 낳으며, 실체는 점점 더 모호한 미궁이 되었다. 비밀이 견고할수록 해법은 난해하고 복잡해진다. 믿음이 굳건할수록 그 믿음에 도전하는 시나리오의 플롯은 정교해야 한다. 여간해서는 필적하기 어려운 거대한 스케일의 미로 탐험이 주는 짜릿함, 이 작품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영화는 철저히 소설을 모태로 했음을 표방했다. 두세 단계의 암호풀이를 한 단계로 줄여버린 간소함 쯤이야 러닝 타임의 한계라고 해 두자. 문제는 영화가 기왕에 다 드러나 버린 성배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사뭇 주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액션은 과감하지 못하고 미장센은 밋밋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다만 몇 초 간 그림들을 감질나게 보여주고 지나갔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내 걸린 포스터는 이 영화의 정직한 간판이다. 왜 하필 다빈치도 모나리자도 아닌 두 주인공의 얼굴일까? 톰 행크스와 오드리 토투의 얼굴로 꽉 찬 화면 구성은, 이 영화의 알파와 오메가가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랭던과 소피는 헐리웃 스타를 통해 환생한 순간 두 배우의 프로필 속에 갇혀버렸다.

사일러스가 찾아낸 성배의 첫 번째 실마리인 욥기 38장 11절도 영화에 와서 더욱 유효해진다. 문자와 달리 ‘여기까지는 와도 좋으나, 더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선이 있음을 영화는 몸소 실천했다. 그래도 관객은 기대의 끈을 놓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암호가 남아 있지 않은가. ‘대가들의 작품으로 둘러싸인 곳, 별 가득한 하늘 아래 안식을 취하도다.’

다빈치와 보티첼리를 필두로 대가들의 걸작이 빽빽히 두 눈을 압도하며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순간이 곧 도래하기를, 그 향연 앞에 충분히 무릎 꿇을 각오가 돼 있는 관객들은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각은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하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기에 영험하신 신의 권능에 미치지 못한다. 아쉽게도 경배의 순간을 맞는 축복은 오직 영화 속 랭던의 몫일 뿐이다.

김원/데일리서프라이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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