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중대신문에서 개최한 학술심포지움 `새로운 밀레니움, 패러다임의
변화와 전망'에서 박이문 교수(포항공대 철학), 강내희 교수(중앙대 영어영
문학과), 김영민 교수(한일대 철학)는 오늘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나름
대로의 대안을 제시해주고 있다.

박이문 교수는 `과학과 자연'이라는 그의 발제를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전제한 뒤, 과학을 통한 합리적인 가치선택만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을 열 수 있는 패러다임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간에게 풍요롭고 축복으로 받아들여 졌던
과학이 이제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등 인간에게 위협적인 대상으로 변해버
렸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박교수의 발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과학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인식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박교수는 과학이 자연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대해 "그것은 자연을 인식하는 하나의
틀일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은 아니다"며 반박하고 있다.

과학적 인식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인식이라는 것이 그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관념적 재구성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자연에 대한 총체적인 진리일 수
는 없다. 다시 말해 결국 과학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박교수는 "과학이 자연과
인간에게 어떻게 이용되는 지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을 뿐"이라며
과학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생태계 파괴와 자연훼손이 초래한 문명의 위기와 책임은 과학이 아니라 과
학을 잘못 이용한 인간에게 있으며 과학은 저주의 대상이 아닌 인류를 위해 봉
사할 수 있는 잠재적 축복"이라는 그의 주장에서 결국 과학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고 과학과 자연의 관계는 곧 인간과 자연의 문제로 귀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과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전환.

하나의 시각만이 완전하다는 그러한 인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전환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인 것이다.박이문 교수가
인식전환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을 꾀한 반면 강내희 교수는 `인문학,
문화연구, 문화공학-지식생산의 전화와 대학의 변화'라는 그의 발제를 통해
`학문하기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학문방법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강교수는 학문하는데 있어 가장 큰 변화의 요인으로 먼저 생산양식의 변화를
들고 나온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산양식의 변화는 곧 지식생산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포드주의 생산방식에서
유연적 생산(포스트 포디즘)방식으로의 변화 과정을 다루면서 그 속에서 지식
생산양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단적으로 예를들면,`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이루어지는 분절된 노동과정으로
인해 파편화된 기술을 요구했던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이 고용의 안정화가 깨진
유연적 생상방식으로 변하면서 분과학문체제는 통합학문적 성격으로 변하게 된
것을 꼽을수 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기술과 직업에 필요한 정도를 기준으로 학문적 가치
를 평가함에 따라 인문학은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강내희 교수는 이러한 외부
적 요인과 함께 인문학 위기가 인문학 내부적 모순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인문학 본연의 역할을 대학이라는
안전지대에서만 수행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무비판을 내장하게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문학 위기에 비판세력으로 등장한 학문방법이 `문화연구'다. 강교
수는 대중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연구라는 학문방식이 소수자에 대한 배려
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여성과 흑인 그
리고 이민자들의 삶의 진실을 대변하도록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문화연구는
과거의 학문에 비해 훨신 더 현실참여적이고 현실개입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
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강교수는 "문화연구가 방법상의 구체화를 지향하면서도 그 구체화가
담론적 수준에만 그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 문화
공학을 이끌어 내고 있다. "문화공학적 접근은 텍스트가 독자적으로 존재하
거나 관념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장속에 존재하며 그것이 생산양식
속에서 창작되고 관리되고 유통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내희 교수는 마지막으로 "문화연구와 문화공학을 학문하기의 새로운 전범
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며 이러한 새로
운 학문 유형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교과과정의 편성과 교육과정의 도입
에 따른 연구와 학습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발제를 맡은 김영민 교수는 우리 학문이 거듭나야 한다는데 모든
논의의 초점을 모으고 있다. 김교수는 "우리의 학계가 논문이라는 글쓰기 형
식을 오랫동안 고수하는 과정에서 논문만이 학문성을 전유하는 유일한 글쓰기
로 인식하게 되었다"면서 우리 학문이 거듭나기 위한 그 시작은 다름아닌 창
의적인 글쓰기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물론 논문이라는 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나름의 효용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은 논증적 담론의 틀
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논문쓰기는 그러한 긍정적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파
행적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결국 김영민 교수는 논문이라는 글쓰기 형식속에
서만 최고의 진리를 담을 수 있다는 논문중심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며,
"조개껍질이라는 틀을 고정시킨 다음 그 틀의 형식적 정합성만을 유지하면 조
갯살을 물론 진주까지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무비판적 타성"이라고 비판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과 관행은 글쓰기의 형식은 무시한 채 내용만을 중요시하는 데서
오는 결과로 바라볼 수 있다. 즉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에는 어떠한 창의적 노
력도 기울이지 않고 내용만을 중시해 온, 즉 `뜻의 학문'만을 해 온 우리 학
계의 관행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김영민 교수가
내세우는 새로운 글쓰기의 방법이란, 뜻은 글의 본질이며 글은 껍질에 불과하
다는 `뜻의 학문'에서 벗어나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글과 함께 뜻을 엮어 나
갈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논문중심주의와 함께 김교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내용적 권
위 즉 원전중심주의로 이는 우리 학문의 자생력을 억압하는 요인으로 보고 있
다. "우리 학인들은 진지하지도 대담하지도 않다"며 내 머리속의 정보에 짓눌
려 내 어깨위의 역사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즉 김영민
교수는 글쓰기의 새로운 모색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종착역은 이
러한 앎이 삶과 만나는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발제에 이은 토론에서 `관념'이라는 뜻과 스타일이라는 글의 형식이
만나는 접점을 설명해 달라는 방청객의 질문에 김영민 교수는 "내 작업의 성
패가 여기에 달려 있다"며 그 자신이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
서도 "글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뜻만은 아님을 점점 느끼게 된다"는 그
의 말은 계속될 그의 학문에 기대를 걸어보게 한다.과거에 대한 정확한 인식
과 과거에 대한 반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1천년을 준비하자는 취지
에서 마련된이 심포지움은 우리 학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발제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위치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으
면서도 토론시간에 서로간에 활발한 의견교류나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그 긴장감을 잃어버린 면은 옥의 티로 남는다.

<김수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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