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사이라는 뜻의 ‘바르도’는 한 상황의 완성과 다른 상황의 시작 사이에 걸친 틈을 뜻하는 티베트 말이다.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에 따르면 사람이 죽어서 환생할 때까지의 중간 사이 또한 바르도라고 한다.

죽음을 배우면 삶을 배울 수 있다는 티베트불교 최고의 경전 [바르도 퇴돌]은 영역 과정에서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이름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영원과 찰나의 틈, 어쩌면 인간의 삶은 그 사이 어디쯤을 머물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히말라야 기슭의 부탄에서 온 영화 [나그네와 마술사]는 간단한 이야기로 영원의 틈을 보여준다. 오직 미국으로 가는 게 목표인 공무원 돈덥에게 시골의 일상은 지루할 뿐이다. 게다가 ‘꿈나라’ 미국은 자신의 한 달 봉급을 반나절이면 번다는 기회의 땅이 아닌가. 마침 도미할 기회를 잡은 돈덥은 사흘 안에 수도 팀푸까지 가기 위해 서두르지만, 느려터진 상급자와 후덕한 인심 덕에 발길이 지체돼 급기야 하루 한 대뿐인 버스를 눈앞에서 놓쳐버린다.

이 나라에서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오직 그뿐인 듯 하다. 차를 기다리는 이들은 다들 가면 가고 못 가면 말지 하는 식으로 느긋하다. 지나가는 자동차라고는 영화 내내 일곱 대가 전부였다. 그나마 두 대는 부르기도 전에 지나가 버린다. GNP 보다는 GNH(Gross National Happiness)를 우선으로 한다는 부탄의 풍경은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에 딱 맞게 고풍스럽다. 길에서 만난 라마승은 안절부절하는 돈덥에게 마술사에 대한 옛날 얘기를 들려준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 타시는 마술공부 중인데 마술에는 관심 없고 예쁜 여자를 만날 궁리뿐이다. 어느 날 동생과 마주앉은 풀밭 위의 점심 중에 그는 백마를 타고 홀연히 낯선 숲 속을 달리게 된다. 폭풍우 치는 밤 낙마해 다리를 다친 뒤 백발노인과 젊은 아내 데키가 사는 집에 묵게 되는데, 그만 유부녀 데키와 사랑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데키와 살기 위해 마술에서 배운 대로 노인을 독살하고 도망치던 타시는, 데키가 강물에 휩쓸려가자 통곡하다 정신이 드는데 깨어보니 여전히 동생과 마주 앉아 술잔을 든 채다. 술잔을 입에 대려던 찰나에 영원을 경험한 셈이다. 그 화산처럼 들끓던 욕망과 살의가 정녕 한 순간의 꿈이었다니. 커튼 사이로 타시를 유혹하던 그토록 생생한 데키의 눈빛과 살 냄새, 격정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된 조화인지 라마승의 이야기에 처음엔 코방귀만 뀌던 돈덥도 막상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마음이 흔들린다. 여정 중에 만난 새침데기 소녀 소남에게 잘 보이려고 줄담배를 끊는가 하면, 이 동행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사과장수 노인에게 승차를 양보하기까지 한다. 그는 어느덧 시계를 보지 않게 된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땅과 사람들이 어느덧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진정한 꿈나라는 미국일까, 지금 여기일까? 돈덥의 저울질을 눈치챈 라마승은 너털웃음으로 화답한다. 꿈나라는 언제나 마음 속에 있다. 나그네는 길을 떠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지만, 돌아갈 길은 또한 어디에나 널려 있으리니.

김원/데일리서프라이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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