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고유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올해도 예외없이
물가는 오르는데, 노동자들의 어깨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전반적인 경제불황
으로 인해 상여금은 커녕 밀린 월급만도 전체 4천억원에 달한다고 하니,고향
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맥이 빠질 것은 뻔하다.

어디 이것 뿐인가? 괌의 비행기 추락사고의 악몽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프놈
펜의 비보는 갓 피어난 희망마저도 접게 만들고, 연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는
또다시 무수한 설과 억측만이 난무하여 말의 가벼움을 부추기고 있을 따름이
다.

하여, 요즘 우리네 민중들이 텅빈 호주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치를 소재로 정치가들 씹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이러한 풍경만 보이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무리 상여금이 안나오고, 월급이 밀리더라도 평소에
`저축' 많이 해놓은 사람들은 와서 즐기시오. 대폭 할인.' 전국 각지의 일류
호텔에서는 추석 연휴를 맞아 다양한 패키지 상품을 내놓았다. 2인 기준으로
1박에 10만원, 사우나와 수영장 이용 무료, 아침 뷔페 무료 등 다양한 상품
을 포함시키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고향에 못가는 사람들을 위해 차례상까지
차려주기도 하고, 심지어 남산에서 `달맞이를 할 수 있는 투어'도 제공한다고
한다. 바야흐로 달맞이도 상품이 된 시대에 살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를 슬프
게 한다.

이렇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습들이 1997년 9월 추석을 앞두고 있
는 한반도 남쪽의 풍경이다. 추석이 끝나면 또다른 풍경이 우리를 맞이할 것
이다. 연휴에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의 숫자가 전년도와 비교해서 보도
될 것이며, 고속도로가 밀려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뉴
스들이 나올 것이며, 도로에 쓰레기를 버린 사람들이 낸 과태료를 산출해서
우리 국민들의 도덕성을 따질 것이다. 여기서 잠시 추석에 대해 잘 모르는
사항들을 살펴보자. 민속학자 주강현씨에 따르면, 안동 지방 같은 경우 70년
대 후반까지는 추석을 대충 넘겼는데, 80년대 들어서 강원도 지역의 단오마
저도 푸대접을 받고 안동 지역도 비로소 추석문화권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추석에는 성묘가 없었는데, 조선후기 서울에서만 있었다고 한
다. 지금의 성묘문화는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시기에 맞추
어 바뀌었다고 한다. 즉 과거에는 따로 이루어지던 것이 지금은 벌초, 차례
, 성묘가 추석때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기사 요즘은 돈만 주면 벌
초도 대신 해 준다고 하니, 무엇이 걱정이랴.

추석하면 떠오르는 물가 상승, 연중 행사로 되풀이되는 교통전쟁, 친지나
형제를 만나서 벌이는 고스톱판, 돈으로 처리하는 벌초 등, 어느덧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이러한 현재의 추석문화는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무작정 기를 쓰고 가는 고향 찾아 가는길, 그것은 일종의 회귀의 본능이고
한국인에게만 드러나는 독특한 정의 모습이다. 과거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추석 풍습은 이어야 할 터지만, 지금처럼 가는 데 하루 오는 데 하루를 쏟아
붓는 형태는 정의 논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소모적이다.

사실 고향찾기도 얼마후면 사라질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대부분 도시
가 고향이니, 땅에 씨뿌리고 거두는 일에 대한 인내와 기쁨 뒤에 담겨있는
추석의 의미도 값질 터인데 그들에게는 앞으로 가을여행 떠나는 신나는 휴가
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투호놀이와 같은 우리의 전통놀이는 점점 사라지고,
고스톱과 같은 일제의 망국병이 만연한 것도 큰 문제다.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과 그것을 살리고 보존하는 일에 너무나 관심이 부족한 것이다. 앞날의
언젠가 남북이 하나되었을 때, 추석날 과연 무엇을 하며 보낼지 걱정이다.

어렸을 적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고, 저녁에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포만감에 젖곤 하던 기억이 새로운데, 어쩌다가 남은 것은 도로변의 쓰레기
와 `왜색'뿐인지 안타깝다.소설가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에서 정확히 1
백년전인 1897년의 추석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 중에`팔월의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삼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라고 하였는데, 이는 풍
요로움과 기쁨 뒤에 담고 있는 슬픔을 나타낸 것이라 짐작된다. 자그마치 1
백년이라는 커다란 시간의 차이 만큼이나 당시 민중들이 겪었던 가난과 설움
은 이제 근대화의 덕분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슬픔이 남는 것
은 근대화로 인한 이기(利器)들을 오용하는 것 때문이라면 지나친 것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이는 굶주리던 사람이 한가위에
열흘 먹을 양을 하루에 먹는 일도 있을 만큼 포식을 했다고 해서 나온 말이
다. 부디 북한의 형제들이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구려." 지
금 창밖에 걸려 있는 초승달의 가난함과 왜소함이 보름날에도 역시 그대로일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권경우, 영문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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