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1)역사를 읽는 다양한 방식들

(2)역사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3)쟁점:『한국현대사재인식』이 왜 화두인가
(4)쟁점:『한국현대사재인식』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
(5)역사교육의 정도(正道)는 있는가-역사 제대로 보기

   역사학의 우주가 무서운 질량과 속력으로 팽창하고 있다. 육체의 역사, 냄새의 역사, 감각의 역사, 독서의 역사 등 낯설고도 섹시한 이름표를 단 책들이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정다감하고 뜨거운 가짜남편과 10년 넘게 무단가출했다가 절음발이 신세로 되돌아온 진짜남편의 틈바구니에서 낀 16세기 프랑스의 가련한 시골 아녀자 베르트랑드(《마르탱 게르의 귀향》)와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기듯 우주와 천사의 기원도 그와 비슷하다는 불경스러운 세계관을 나팔 불고 다녔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16세기 이탈리아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의 슬픈 이야기(《치즈와 구더기》)―실명을 가진 한 개인이 ‘과거에 진짜로 겪어야만 했던 경험’을 꼼꼼하고 흥미롭게 재구성한 이런 책들이 역사서술의 지각변동을 주도하고 있다.  

  미시사, 일상생활사, 사생활의 역사, 민중문화사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소개되는 위와 같은 새로운 역사학이 겨냥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왜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준과 방식으로 과거를 다시 읽고 해석해야만 하는가? 새로운 역사학의 도래에 교양독자층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간략히 모색해 봄으로써 역사학의 어제를 회고하고 오늘을 진단하며 내일을 전망해 보자.

  새로운 역사학은 무엇보다도 왕과 영웅들의 업적과 무용담으로 가득 찼던 과거 정치외교사 중심의 역사서술에 대한 반성을 요청한다. 모든 중요한 일들은 왕이나 대신, 장군이나 장관 등이 주재하는 궁전, 의회, 혹은 전쟁터 등에서 결정되었다는 전통역사학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근대성이론 같은 거대한 서사구조에 과거를 억지로 짜 맞추려는 사회경제사의 한계도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작고, 사적이며, 시시껄렁하다는 이유로 역사의 골방에 갇혔던 낮은 목소리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오랫동안 야사(野史), 음담패설, 혹은 ‘전설의 고향’ 같은 황당하고도 허튼 이야기로 배척되었던 이야기들이 가지는 중요한 역사성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이 아니라 ‘왕의 남자’가 삼켜야만 했던 좌절된 꿈과 분노의 사연을 경청해야할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역사를 읽는 이와 같은 새로운 방식은 지난 반세기에 진행되었던 각종 변화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960년대 말부터 실험되었던 ‘아래로부터의 역사’, 히피와 반전운동으로 상징되는 68혁명, 1970년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부르짖던 중심의 해체, 1980년대 말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가 동반한 진보로서의 역사학의 종말 등이 결합하여 잉태한 새로운 역사학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학의 지평을 넓히고 깊이를 더했다. 

 우선, 새로운 역사학은 우리가 유일하고도 보편적인 역사라고 수용했던 것이 사실은 특정권력과 이해관계를 옹호하기 위한 지식체계였다고 폭로한다. 세계문화사에서 배웠던 역사지식은 서양백인들이 다른 문명권에 대한 인종적인 편견과 우월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조직한 구성물일 수도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르네상스와 18세기 계몽주의는 휴머니즘과 인간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 대한 근대적 속박이 강화, 정착되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

 또한, 이성과 합리주의의 승리라는 훈장에 빛나는 현대사는 ‘비정상적’으로 분류된 소수자(광인과 동성애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위한 야만의 기록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암기했던 과거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들이 승자의 전리품이나 변명에 불과하다고 심각하게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역사가 각 개인의 주체적인 위칭서양과 동양, 여성과 남성,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등―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읽힌다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역사가의 진정한 책무는 신기루 같은 허구적인 과거진실을 찾아 헤매는 대신에, 어떤 것이 어떤 이유로 ‘역사적 사실’로 가공, 포장되는지의 과정을 역 추적하는 작업이다.

 국가 정체성의 확립과 정권이데올로기의 수호를 위해서 거짓의 ‘오래된 전통들’이 지금도 창조 혹은 발명되고 있으며,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민족주의적 구호에 호응하여 국사는 오늘도 내일도 새롭게 씌어지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양적?질적으로 폭발직전에 다다른 ‘만들어진 역사들’의 범람을 국정/검인정 교과서만으로는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구나, 교과서 그 자체도 이미 절대적인 역사지식과 역사교훈의 전범(典範)이 아니라, 과거를 특정한 색깔의 공식기억으로 각인시키려는 수많은 훈육의 도구들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새로운 역사학이 역설하는 위와 같은 주장들이 매우 도발적이며 파괴적이라고? 과거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기준이 없다면, 역사학은 파편화되고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의 역사를 가진다’는 냉소적인 무정부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일리 있는 불안이며 항변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거대담론적인 관점과 미시적?일상사적인 시각 중에서 과연 어떤 쪽이 과거 보통사람들의 생애를 설득력 있게 묘사?설명하는데 더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오늘 우리의 진짜 삶은―과거 우리 조상들의 삶이 그러했듯이―여전히 하찮고, 천박하며, 때로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밀린 핸드폰 요금독촉에 쫓겨 목숨을 끊고, 국회의원이 여기자의 가슴을 허락 없이 희롱하고, 가난한 연인들이 비데오방에서 나누었던 밀애가 인터넷 공간을 떠다니는 평범하고도 예외적인(재수 없는?) 사건들이 모여 오늘의 역사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패턴과 행로는 장기 지속적으로 반복 혹은 지속된다. 16세기 프랑스 비련의 여인 베르트랑드처럼, 21세기 초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이다. 같은 맥락에서, 16세기 교회권력의 심장부인 이탈리아에서 유물론적 우주관을 피력했다가 목숨을 앗긴 메노키오의 경우처럼, 오늘도 지배적인 지식권력은 참을 수 없는 다른 견해와 비판을 폭력적으로 침묵시키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성적, 경제적, 직업적 불평등이 빚어내는 유치하고도 위태로운 세상살이의 다양한 갈등과 오해의 무늬와 결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현미경적 전망이 절실하고도 유용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역사학의 포플리즘적 접근법이라는 일부 경계(警戒)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읽는 새롭고도 대안적인 여러 방식들을 환영해야할 이유와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육영수 문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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