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캠 학생지원처 주최로 베트남 문화교류 및 지역봉사활동을 13박 14일 동안 다녀왔다. 문화교류단은 주로 호치민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베트남과 한국 나라의 언어, 음식, 역사 등의 양측 문화를 서로 교류하는 일을 했다. 한국의 사물놀이를 할 때는 서로 덩실 덩실 춤을 추며 한국의 문화에 귀 기울였고 그들의 역사를 들을 때는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우리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키가 작아서였을까. 아니면 화장을 안해서 였을까. 베트남 학생들은 중3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이었으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위에 지치고 낯선 환경에 지쳐있던 단원들에게 그들은 항상 웃음을 띄었고 약간은 어색한 발음으로 피곤하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라며 단원들을 걱정했다.
 베트남에서 지내는 동안 지역 봉사활동 차 고아원에서 지낸 크리스마스 날을 잊지 못한다. 한 주먹의 사탕을 크리스마스 최고의 선물로 여겼던 아이들의 선한 눈망울. 그들은 타국에서 온 낯선 문화교류단의 뺨에 입맞춤을 하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였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참 많은 점이 닮아있다. 그 중에서도 역사적 배경을 빼놓을 수 없다.
19세기 후반 열강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점,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 패망으로 식민 지배를 벗어날 때 세계열강의 이기주의에 의해 남북 분단의 설움을 당해야 했고 동족인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했으며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여기는 베트남 전쟁 박물관. 한 사진 앞에서 눈길이 머문다.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딸로 보이는 어린 아이의 저고리를 여무는 모습.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고 겁에 잔뜩 질려 있는 모습이다. 도대체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 실패하고 물러나게 되자 미국은 베트남을 맡게 된다. 베트남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은 우방국과의 연합을 구성하여 베트남 전쟁을 시작한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초토화 작전을 진행했고 당시의 전쟁 규모는 전반적인 규모에 있어서는 제1,2차 세계대전에 비해 뒤지지만 동원 병력, 사상자수, 전쟁비용과 사용탄약량, 폭탄량 등에 있어서는 제1, 2차 세계대전의 규모를 훨씬 초과할 정도로 엄청났다고 한다. 당시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 현장에서 용감하게 사진을 찍고 있던 한 전쟁 사진 기자는 미군이 베트남 여인들을 성폭행하고 집단 학살했던 장면을 포착했고 그 사진은 지금 베트남 전쟁 박물관에 이렇게 걸려있다.
  베트남 전쟁은 기가 막힌 문화유산을 남겼는데 그 중에 하나가 조그마한 호치민시 서북쪽 75km지점에 위치 해 있는 총 길이 250km의 꾸찌 땅굴이다. 정글 속을 안내하던 안내원이 갑자기 관광객들에게 땅굴 입구를 찾아보라고 이야기한다.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땅 색깔의 나무 뚜껑을 들어 올리자 A4용지 크기보다 약간 큰 구멍이 나타난다. 몸집이 큰 미군은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는 베트콩만을 위한 굴. 이마져도 관광객들을 위해 확대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생활했다니 베트남인들의 그 끈질긴 인내력과 강한 정신력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베트남에서 있는 동안 만나 뵜던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의 책 저자 반레시인. 시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친구인 반레를 대신해 자신의 이름 레치 투이를 버리고 반레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베트남 반레 시인은 자신의 한평생을 바치며 베트남 역사를 알리겠다고 다짐한다. 그가 그토록 알리고 싶었던 베트남 전쟁과 역사.
 수많은 중국의 침략, 미군의 초토화 작전, 21세기 현재까지도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나라 베트남. 하지만 베트남 인들은 세계 최대의 경제력과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마저도 무릎 꿇게 한 나라이며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밝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매력 있는 나라였다.
한아름 기자 hanarumi@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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