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증 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양화학과 93학번) 많은 여성들은 ‘연예인 피부’를 갈망한다. 밀착 카메라에 찍혀도 모공 하나 보이지 않고 잡티 없는 깨끗한 얼굴을 가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이도 붙여 보고, 꿀도 발라 보고, 우유로 세수도 해봤지만 역시, 쉽지가 않다. 우둘투둘하고 울긋불긋한 피부를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한 화장
농훈 김성훈중앙대 명예교수(전 농림부 장관)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74)의 아호는 농훈(農熏)이다. 농업·농촌·농민의 기운이라는 뜻풀이는 그의 선한 인상과 잘 어울린다.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를 줄줄 외고 다니던 서울대 농대 재학 시절, 그는 그가 만든 모임‘한얼’에서 붙여 준 이 아호를 그는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박범훈중앙대 12대 총장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작곡과 72학번) 청와대 박범훈 교육문화수석(64)에게 소리는 연(緣)이다. 나팔을 잘 불던 경기도 양평의 한 소년이었던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에선 주제곡을 작곡해 지휘봉을 잡았다. 박범훈 수석은 “소리를 통해 세상 모든 것과 소통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런 그에겐 또 하나의 인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중석 원장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죽은 자들의 변호인’에 가깝다. 그의 ‘손님’은 말이 없다. 어디가 아픈지, 무엇이 문제인지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서중석 원장은 과묵한 손님과 더 깊은 대화를 한다. “죽음에 관해서는 본인도 왜 돌아가셨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세요. 저는 그분들의 조용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실패해도 괜찮으세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성공을 한 후에나 할 수 있는 말이지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선 누구든 도전하기를 망설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송우달 한겨레 전략사업본부장(54)은 다르다. 그의 좌우명은 ‘실패할 수 있는 용기’. 학생기자 시절부터 꾸준히 일기를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일명 ‘강경대 치사사건’이 터졌고, 군대에서 제대 하자마자 IMF가 닥쳤고, 참여연대에 돌아오자마자 대선을 겪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큰 사건은 언제나 그가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때 찾아왔다.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결코 운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언제나 꿋꿋이 맞서왔다. 늘 권력과 제도에 맞서 투쟁해왔다. 그가 살아있는 한,
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호돌이’는 ‘88 올림픽’ 하면 함께 떠오르는 상징이다. 아이덴티티나 마스코트 개념이 전무하던 시절,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행사에 앞서 서울의 상징이 필요했고 국민들의 공모로 호랑이가 결정됐다. 국민들이 뽑은 호랑이를 ‘호돌이’로 다시 태어나게 한 사람이 바로 김현 대표다. 이후로 그에게는 항상 ‘호돌이 아빠’라는 수
강원도 산골소년의 험난했던 학창시절장영준 영어영문학과 교수(49)를 마주하면 어디선가 구수한 향기가 풍긴다. 하버드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면 어디선가 ‘버터 냄새’가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숨길 수 없는 친근한 냄새에 대한 궁금증은 ‘고향’을 묻는 질문에 바로 풀려 버렸다.-고향이 어딘가?“강원도 홍천이요.(웃음) 옥수수밭
용산 아이파크몰 양창훈 대표(54)는 뼛속까지 유통의 피가 흐르는 유통전문가다. 시작은 군시절 우연히 병참장교가 됐을 때였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하나부터 열까지 납품 기록을 손으로 작성하고 군용품들을 배급하며 유통의 첫맛을 느꼈다. 그 첫맛이 너무 달콤했던 걸까? 이후의 삶은 줄곧 유통인생이다. 대표이사의 자리에 오른 지금까지도 그의 책상에는 유통에 관련
녹십자 조순태 사장(59)은 평범한 ‘영업맨’들에게 전설과 같은 존재다. 약이라곤 전혀 몰랐고 전공도 딴판이라 우려속에 입사했던 ‘꼴찌’ 신입사원은 28년 후, 7000억 매출을 올리며 제약업계 국내 2위를 다투는 녹십자의 사장이 된다. 28년 동안 굴곡도 없었다. 늘 일등이었다. 그의 이력에는 쉼표 한 번 찍히지 않았다. 하지만 말단 영업사원에서 사장 자
EBS 사장, MBC 제작본부장, 청와대 비서실 국내언론총괄국장, 예술의전당 이사, 여수엑스포 총감독… 중앙대 출신 문화계 인사들의 직함이 아니다. 단 한사람이 걸어온 길이다. 스타PD도 많고, 영화계 거물들도 많지만 고석만(연극영화학과 68)처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이 정도 했으면 더 이상 이룰 일이 없어 보일 정도지만 그는
김대오 특종을 마다하는 이상한 연예기자 여기 특종을 자기 발로 차버리는 바보 같은 연예기자가 있다. 너무나 냉정하고 엄혹하다는 연예계에서 아직도 ‘사람’이야기를 하는 순수한 연예기자가 있다. 21년동안 정글같은 연예계에 있었으면 연예인에게 질릴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이 스타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연
국내 1위 대표 인쇄기업 타라그룹 강경중 회장 “줄줄이 망하던 98년 IMF, 그때가 우리 기업 시작이죠” 강경중(60) = 중앙대 법학과 72학번. 76년 그의 형 강영중 회장과 함께 대교그룹을 설립한다. 87년 대교그룹에서 나와 89년 타라그룹의 전신 바른인쇄를 설립했다. 그가 설립한 타라그룹은 현재 연 매출 3000억, 해외 수출 1000만불 규모로
마르쿠스 슈타인 교수의 겉모습은 독일인이다. 국적도, 생김새도, 직업도 어느 하나 독일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학생들은 처음 그를 만난 순간 덜컥 겁을 먹고 만다. “Hi”로 인사해야 할지, “Guten Tag”이라고 말해야 할지 학생들은 헷갈린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어서와요”였다. 인터뷰는 그가 즐겨 찾는 이태원에 위치
산악인 남선우. 많은 이에겐 낯선 이름이다. ‘산악인’이라면 대부분 엄홍길, 박영석을 떠올린다. 하지만 산악계에서 남선우는 낯익다. 중앙대 농업경영학과(72학번)를 졸업하고 그의 나이 26세에 북알프스를 종주했다. 28세엔 히말라야를 단독 초등했다. 80년대 초반,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알파인 방식(셰르파를 대동하지 않는 등반)을 시도함으로써 대한민국 산
중앙대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았고 포항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에는 1995년에 임용됐다. 2009, 2010년 2년간 교무처장직을 수행했고 2011년에 폐지됐던 교무처가 올해부터 부활하면서 다시 교무처장을 맡게 됐다. 이와 동시에 중앙대 유일 명품강의라 불리는 ‘우주의 이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행정업무와 교
중대신문은 올 초부터 윤종빈 감독 인터뷰를 위해 섭외에 나섰다. 맨 처음 홍보대행사에 연락을 취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개봉시즌 인터뷰는 끝났다’는 말과 함께 단칼에 거부를 당한 것. 윤종빈 감독은 말했다. “보통은 영화 개봉 즈음에 인터뷰를 많이 해요. 인터뷰를 안 좋아 하기도 하고 한 얘기를 계속 반복해야 하니까 그 이외에는 거의 안
중앙대 서양화과 73학번.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1년 동안 중앙대 진학사실을 숨기고 지내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미술계에 입문한다. 1학년 때 만난 음대 여학생과 캠퍼스 커플이 됐고 군복무 중이었던 24살에 결혼을 하게 된다. 졸업을 하고 가장이라는 배역에 충실해야 했기에 농화학회사에 다니다 결국 10년 만에 회사를 뛰쳐나온다. 갤러리를 열어 4년 여간 다양
마리헬렌 브라쇠르. 그녀는 1972년 한국에서 맞는 첫 크리스마스에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 선물은 바로 배현정(裵賢貞). 그녀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배현정이란 이름으로 한결같이 환자들과 함께 살아왔다. 지난달 22일.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에 위치한 전·진·상 의원에서 배현정 원장을 만났다. 쉽지 않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 대표로 농구계에 이름을 알린 이대성. 꿈에 그리던 중앙대에 진학하게 되지만 다니는 동안 대학선수로서의 생활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대학팀과의 합이 잘 맞지 않았던 것. 3학년 때 학교를 휴학하고 미국 진출을 결심한다. 그리고는 NBA 하부리그인 D리그 진입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한국선수가 NBA에 진입하기란 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