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언론의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를 바라보는 대학생의 눈, 대학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 등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져야 할 내용은 대학 내부에 대한 보도다. 다른 어떤 매체에서도 할 수 없는 우리 대학의 이야기. 학내 구성원이 제1독자인 대학언론에서는 대학보도가 주를 이뤄야 한다. 중대신문 역시 대학보도를 가장 중시하고 있는 듯하다. 단적으로 매주 1면을 장식하는 기사가 대학보도임을 확인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지난 제1918호 역시 전학대회에 대한 보도가 1면을 장식했다. 부족한 의결정
학교의 중요한 회의를 중대신문에 직접 공개하는 일이 늘고 있다. 밀실 행정보다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언론의 책임은 더 커졌다. 사실보도와 논점 설정에 있어 충분한 전문성과 독립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존립의 정당성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지난 제1918호 ‘Editor’s Letter’는 이런 어려워진 상황을 보여준다. 최근 교수협의회(교협)는 중대신문의 대학평의회 선출 사설에 성명을 냈다. 교협이 더 좋은 보도를 위한 설명에 소홀했다면 잘못이며, 만에 하나 ‘가르침의 대상’으로
중대신문을 펼쳐들었을 때, 얇은 신문지에서 느껴진 것은 다름이 아닌 단단함이었다. 평소 중대신문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관심이 가는 기사 위주로 살펴봐왔기에, 신문지로 이렇게 꼼꼼하게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제1917호 중대신문에는 흥미로운 기사들이 많았다. 이전에도 홈페이지로 접하던 기사들인데 유난히 단단함이 느껴진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해보았다. 그 결과 ‘종이’와 ‘땀’에 정답이 있음을 깨달았다. 종이신문은 그만이 가진 신뢰성과 견고함이 있다. 중대신문을 펼쳐 기사를 읽으면 인쇄된 글자
제1917호 중대신문에서 ‘짜임새’가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다. 여러 구성원의 입장을 들어가며 객관적으로 사건을 다루면서도 사건의 중요한 맥을 짚었다. 또한 사회 문제를 꿰뚫는 독특한 시각과 일반 학생들의 이야기로 신문의 재미를 한층 올렸다. 1면과 사설에서 학생대표자의 횡령 사실을 다뤘다. 횡령 사건으로 학생사회에서의 신뢰는 무너졌을 것이다. 학생대표자가 학내 자치를 위해 전공단위 회칙, 세칙 그리고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중대신문의 논조는 당연한 결과다. 2,3면에서는 전공개방 모집제도에 나타난 대학본부와
요즘 대학생들이 신문을 얼마나 읽는지 잘 모르겠다. 특히 공대에 다니는 이과생들 중에서는 더더욱 드문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대신문은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신문이라고 생각된다. 학교 어디에서든 쉽게 신문을 구할 수 있고 내용 면에서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제1916호에는 ‘틀 벗가기’라는 기획 기사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관심이 많이 가는 주제였고 앞으로 이어질 다음 기사도 기대가 되는 기획 기사였다. 그리고 안성캠 총학생회장 인터뷰 또한 관심을 두고 읽었다. 우리가 뽑은 후
중대신문 제1916호는 상당한 즐거움을 제공했다. 전공개방 모집제도의 진통으로 나름 어둡고 무거웠던 신문의 주제는 학내 여러 소식을 전하면서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안성캠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의 인터뷰를 다루면서는 흥미로워졌다. 이후 문화면을 거쳐 우울증 기획과 앙잘앙잘 꼭지에 이르면 정말 말랑말랑해진다. 전체 신문기사를 구성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느껴지는 구성이었다. 신문을 읽으며,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위해 고민하는 편집부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다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바로 기사의 밸런스가 맞
꽃샘추위에 예기치 못한 눈이 오던 3월도 지나가고 한낮의 햇살은 점점 더 따뜻하게 캠퍼스를 비춘다. 하지만 중대신문 제1915호에서 다뤄진 아직 차가운 현실은 우리에게 안주할 때가 아니라고, 깨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제1914호에서 ‘Me Too(미투) 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뤘던 것에 이어, 이번 제1915호에서도 1면에서 3면에 걸쳐 중앙대에서 발생한 각종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사건의 경위와 진행 사항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이러한 사건들은 사람들의 꾸준한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중대신문이
흥미롭다. 흥미롭게도 중대신문에 대한 평가는 학내와 학외로 나뉜다. 학내 사안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건 단연 ‘Me Too(미투) 운동’이었다. 개강호 1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Me Too와 With You는 제1915호에서 빛을 발했다. 잇따른 성폭력과 2차 가해 의혹에 대한 고발도 담았다. 고발에만 그치지 않고 성폭력 대응 매뉴얼을 제시한 점은 인상적이다. 고발이 그저 허공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중대신문의 바람이 담긴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성폭력에 대처하는 학교 측의 노력도 충실히 담았다. 미투
평가에 앞서, 이런 기회를 마련해준 중대신문에 감사함을 표한다. 녹지 편집장으로서 무언가를 평가한다는 것이 조금 조심스럽다. 우선 페미니스트로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나 최근 이어지는 ‘Me Too(미투) 운동’에 대한 기획 기사다. 기획 기사에서는 대학가의 민낯을 파헤치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고 연대할지를 짚었다. 외부 피해자뿐만 아니라 중앙대에도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굉장히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 부디 이처럼 학생들의 감수성을 키워줄 수 있는 기사가 계속 실렸으면 한다. 7면과 8면에서는 각각
새내기의 설렘과 재학생의 익숙함이 물씬 풍기는 개강 시즌이다. 사회에서는 오늘도 끊임없이 이슈가 생기고, 학교에서는 각자의 관심거리에 따라 다양한 대화가 오고 간다. 제1914호 중대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사회 이슈와 관심거리를 접목할 수 있는 좋은 글이었다. 특히, 개인적으로 크게 관심 있었던 ‘Me Too(미투) 운동’에 관한 기사를 여러 번 읽었다. 미투 운동이 힘을 더해가면서, 각계에 숨어있던 성폭력 범죄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1면에서는 중앙대 교수의 성희롱 의혹을 다뤘는데, 학생과 교수의 입장을 고르
새 학기가 시작됐다. 개강을 맞이한 대학생들은 이맘때쯤 저마다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다시 등굣길에 오른다. 학보사 역시 마찬가지다. 학보사는 개강호를 통해 이번학기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지 그 목표를 보여준다. 1면은 중대신문 특유의 파격적 편집이 눈에 띄었다.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Me too(미투)·With You(위드 유) 운동’의 해시태그로만 지면 절반을 구성했다. 그 자체로는 신선한 시도였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했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신문 전체를 관통하
우선, 중대신문을 읽고 글을 남길 의미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지난 제1913호를 읽으면서 중대신문이 단순 사실 전달을 넘어 학내 구성원 간 소통이 필요한 분야에 많은 기여를 한다고 느꼈다. 특히 지난해 발생한 동아리 내 성폭행 사건을 다룬 기사가 인상깊었다.사건의 경위와 이후 진행된 일을 여과 없이 전달함으로써 이 사건이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리라 생각한다. 또한,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이슈인 전체교수회의와 정치 팬덤이라는 주제에 중립성을 지키며 전달한 데 있어서 중대신문
먼저 대학신문으로서의 명맥을 이어오는 중대신문에 기고할 기회를 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중대신문 기사를 보며 중대신문이 중앙대 학생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 사안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지난 제1911호에는 학생 대표자 선거 결과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관심 가져야 하는 부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줬다. 그리고 예민할 수도 있는 자연대 선거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며 중앙대 학생들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지난 제1911호에는 학생들이 관심 가질만한 기
뉴스가 넘쳐나는 세상, 그러나 막상 더 생각하지 않으면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없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신문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만고만한 사보(社報)가 아닌, 대학의 가치를 담은 중대신문에겐 더욱 어려운 질문이다. 중대신문이 온라인 게시판과 다른 것은 정리된 시각과 검증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제한된 인력과 자원으로 억지와 왜곡이 곳곳에 숨은 대학의 이슈들을 차분하게 다루고 있지만, 좀더 넓고 깊게 문제의 본질을 살폈으면 할 때가 있다. 지난호는 졸업특집호였다. 교수와 학생을 늘어놓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우리의 졸업식은 어떤
중대신문 제1910호를 보고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2017년 한 해동안 단연 눈에 띄는 키워드는 ‘동성애’였다. 각종 뉴스 포털이나 TV시사 프로그램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동성애’와 관련된 이슈가 자주 등장하곤 한다. 올해는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와 관련된 일부 기독교의 ‘동성애 반대’, 퀴어퍼레이드 등 다양한 이슈가 대두되곤 했다. 그러던 중 중대신문 제1910호를 통해 동성애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게 됐다. 문화면의 ‘클리
최근 들어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는 단순히 학기가 막바지에 달했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학가는 추운 바람과 함께 다가올 다음해의 학생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제1910호 역시 각 후보자의 공약과 선거 일정 소개를 위주로 선본 인터뷰를 크게 다룸으로써 학내 언론의 역할을 바삐 수행한 듯하다. 최근 국회 본회의에서 국·공립대뿐만 아니라 사립대에서도 대학평의원회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면에서 다룬 대학평의원회의 대학본부 평가는 타대의 입장에서도 유익한 기사였다. 특히
모든 것이 실용이나 효율로 평가받는 이 자본의 시대에서 예술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면 무기력해진다. 비근한 예로 예술대는 대학 구조조정의 일순위이다. 예술대의 성과가 대학평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예술적 성과란 이 사회에서 직접적인 쓸모가 없다. 그러나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쓸모가 생긴다. 예술의 쓸모없는 쓸모란 20세기 중반, “절망에 던져진 인간에게 거의 유일한 희망이 예술”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올 여름
요즘 아침마다 선거 구호가 울려 퍼진다. 추운 날씨와 대조되는 학우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 그 날의 첫 수업을 들으러 갈 때 왠지 더 힘차게 걷게 된다. 제1909호에서는 다음해 맞이할 새로운 중앙대의 ‘뱃사공’ 후보자들을 소개하는 선거 기획을 다루고 있다. 부끄럽지만 총학생회의 선거 공약을 보고 비판의식을 그다지 가지지 못했다. ‘아 이런 공약이 있구나’하며 가볍게 넘겼을 뿐 공약을 일일이 뜯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제1909호의 선거 기획을 보며 현재 서울캠 총학생회 ‘온&r
이번학기 중대신문 문화부가 의욕적으로 연재하고 있는 ‘클리셰 들여다보기’를 흥미롭게 읽고 있다.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의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는 기획 의도가 참신하고 클리셰를 ‘파헤쳐 보’는 솜씨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제1908호에는 내가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여귀’를 다루고 있어 더 꼼꼼히 읽어 보았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한 달 주기로 영화가 바뀌던 동시상영관에서, 그때 내가 본 영화들은
신문의 얼굴인 1면은 기사의 배치만으로도 편집자의 의도를 헤아릴 수 있다. 제1908호의 1면은 안성캠 기숙사 문제, 310관 엘리베이터 고장, 서라벌홀 화장실 침입 등 학생의 살결에 직접 와 닿는 기사들로 짜여졌다. 총 4개의 면을 할애해 ‘학생자치기구 공약 이행 점검’을 다뤘음에도 학생들에게 더 필요한 정보를 앞서 제공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신문을 만드는 입장에서 종종 기자들의 노고가 더 묻어난 기사를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하고 싶기 마련이다. 허나, 이는 편집자 중심적 시각이다. 독자들이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