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에 우리 중앙대에 강사로 오셨던 어느 분의 이야기다. 그는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사서오경』을 떼고 전국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을 간 것은 지난 1927년이었다. 미국 유학생이 아주 드문 시절에 그는 우스터대 학부를 수석 졸업하고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그를 초빙하려는 대학이 많았지만 그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기로 약속한 함흥의 영생여고보로 복귀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였고 가르친 것은 그 언어에 담긴 민족의 정신과 세계
20대에 물리학자의 길을 선택해 제동장치 없는 기차처럼 지난 30년을 쉼 없이 달려왔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이 없었더라면 이번학기도 강의, 국내외 학회 출장, 공동연구차 해외 연구소 방문, 실험데이터 분석과 논문작성으로 정신없이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한가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강제적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교수 직업의 특성상 ‘나이 오십’이 주는 중력은 못 느꼈을 것이다. 해외 학회와 실험 스케줄이 줄줄이 취소돼 잠시 멈춰서 삶에 관해 성찰하는
필자(筆者)는 타대에서 중앙대로 옮겨서 연구와 교육에 이바지한 게 엊그제 같은 데 현재(現在)까지 24년이란 세월이 쏜살같이 가버리게 됐다. 지난 1997년 당시 부임하자마자 바로 한국은 IMF 자금을 지원받게 되는 상황에 처했었다. 그때는 아날로그의 시대여서 카메라, 캠코더, 카세트테이프를 사용했고 디지털시대로 변모하면서 CD와 MP3가 10년 정도 유행하더니 이제는 모바일 폰 하나로 기능의 대부분 포함되도록 발전했다. 그 때와 현재는 다르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사태로 악성으로 진전된 위기상황인 것은 틀림없다
밀레니엄(Millenium)이 시작된다고 흥분과 기대에 싸였던 지난 2000년에 개봉된 영화 중에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유학 중에 자막 없이 본 영화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비록 CG임에도 그 엄청났던 파도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배를 거의 수직으로 세우면서 그 배를 장난감처럼 보이게 했던 그 파도를 일으킨 것은 바로 영화 제목인 이었다. 이 엄청난 폭풍은 1991년 미국 동부 해안을 실제로 강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둘 이상의 태풍이 충돌하여 그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커
나는 10여 년간 EBS 등에서 PD로 활동하다 유학을 다녀와 2008년부터 대학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러한 이력 때문에 PD나 기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과 진로상담을 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상담을 할 때면 늘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오랜 기간 여러 학생들과 만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이다. 오래전에 키만 멀대 같이 크고, 순한 눈동자를 껌뻑이던 학생이 찾아왔다. 첫인상에서 나는 독하게 일해야 하는 PD에 어울릴까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시트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에 반짝이는 섬
강의실로 가는 대신 예약된 스튜디오로 발걸음을 옮긴다. 잘 되던 마이크 소리가 안 나오고 말이 자꾸 헛나와 다시 찍기를 반복한다. 강의실에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다양한 표정이나 제스쳐로 반응하는 학생들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강의 중 자가발전되면서 흥분하기도 했던 예전에 비하면 적정 수준의 각성조차 도달하기 어렵다. 진한 커피를 한잔 들이키고 다시 앉아본다. 휴...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점차 이산화탄소로 채워지면서 이게 다 산소 결핍 증상인가 싶고 점점 웃음기는 사그라져가는 것을 느낀다. 이전에 없었던 팬데믹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
4월 15일 기준으로 보름 전, 지인에게서 대구의 포스트 코로나 대응과제(교육부분)에 관해 자문을 해달라는 멜을 받았다. 말미의 “대구의 봄은 그냥 이렇게 지나갑니다...”가 뇌리에 남는다. “서울의 봄도 중앙의 봄도 저의 봄도 그냥 이렇게 지나갑니다.”라고 맞장구를 쳐야지 하다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대구를 OECD가 최근에 제시한 「학습 나침반 2030」‘교육에서의 새로운 표준(the new normal in education)’을 만들 기회의 땅으로 치고나가자고
지난해 초에 종영됐던 ‘스카이(SKY) 캐슬’ 드라마를 보면서 필자는 사실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드라마이다 보니 허구적 요소도 있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자녀 교육에 사활을 거는 부모들의 모습은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대학 진학을 위한 결정권은 학생이 아닌 부모가 쥐고 있었고, 그들의 인생은 입시 코디네이터들이 결정해줬습니다. 이때부터 현실은 점점 삭막해질 뿐입니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무한 경쟁 시대에 친구들을 ‘적’으로 생각해야지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강을 건너는 사람이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자 바로 배 위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가 배가 건너편 뭍에 도착하자 칼자국 표시 아래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에 나오는 이 고사는 일반적으로 융통성 없이 현실에 맞지 않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대부분 이 이야기를 접하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반응을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비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칼을 떨어뜨렸을 때 표시한 곳은 과거의 위치이다. 배가 뭍에
돌이켜보면 좋은 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 제도교육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때문이었는지, 어린 시절의 설익은 반항심 때문이었는지, 제도교육에 정면으로 저항할 용기는 없으면서 항상 조금씩은 엇나가려고 했다. 대학생이 돼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강단에 선 이들을 불신했다. 강의를 열심히 들은 기억보다는 ‘왜 저런 내용을 배워야 하지’라며 따분해했고, 강의 내용의 이면에 숨은 정치적 편향성을 의심했으며, ‘왜 본인의 주장만 내세우지’ 하며 언짢아했다. 심지어 ‘제도권을 바꾸
정신 활동이 뇌에 있다고 생각한 인물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이다. 그는 ‘신성병에 대해’라는 주제로 “우리는 뇌를 이용하여 사고하거나 이해하거나 보고 듣거나 하며, 추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 나쁜 것이나 좋은 것, 그리고 쾌, 불쾌를 알 수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16세기에 데카르트는 ‘심신 이원론’을 통해 인간의 몸은 기계에 불과하지만 신경을 통해 공기가 뇌에 운반되고 송과체에서 마음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 폴 브로카가 대뇌피질에
개강이다. 듣기만 해도 생동감이 넘친다. 강좌, 급우, 스승과 제자 모두 새로운 만남이다. 대학 캠퍼스는 젊음의 활기로 가득하다. 캠퍼스 풍경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어도 개강 때의 모습은 한결같이 생동감이 넘친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할 대학 시절이지만 오늘날 대학생들의 현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 크다. 젊은이에게 꿈을 가지라고 하기에는 현실의 무게가 엄중하다. 상투적이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한 문장은 “꿈을 가지고 도전하라!”다. 요즈음 젊은이는 미래의 꿈보다는 현실적 목표를 세운다. 젊은
58세가 되던 작년 초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한 가지 조금은 엉뚱한 제안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나이가 60세가 되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인생의 시점이 아닐까 해서, 동년생 친구들에게 그 때까지 각자 한 가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는 취지의 제안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그다지 밝은 인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우리 스스로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 둘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서 그러한 제안을 했던 거지요. 저는 늘 꿈꾸어
우리는 교육을 백년지대계라 일컬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현실에서 얼마나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느끼며 소통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교육열기가 뜨겁기로 유명하나 격변의 역사만큼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교육의 변화를 겪었다.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동양문화권의 범주에서 세계문화의 범주로 변화되는 전환기를 거치며 함께 변화한 한국 교육은 빠른 시간 동안 눈부신 인재들을 배출했지만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다. 특히 교육에서의 소통 부분은 교육의 현장에서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인데 예술 교육의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으로 구성된 4차원 시공간이라고 한다. 공간은 전후, 좌우, 상하 그 어디로도 이동이 가능하지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의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변화는 무질서도(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인 과거의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깨어진 유리잔은 스스로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지 않으며 과거로 돌아가 우리의 삶의 흔적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엔트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대거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에 한국인 밀집 지역을 벗어났지만 도심에 가까운 곳을 개발하여 살았다. 이런 곳은 일제 강점기에 신시가지로 발전하였고, 광복 이후에도 도심으로 유지되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일본인 밀집 거주 지역으로 발전된 곳은 진고개 일대이다. 그리 높지 않은 고개가 많은 지역이지만 진창이어서 집을 짓고 살기에 불편한 곳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별로 살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곳은 오늘날 명동과 충무로 일대이다. 중앙대학교 인근에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개발한 주택지가 있
우리나라에는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말하는 대로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말이 지닌 힘을 의미한다. 즉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좋은 말을 하면 좋게 되고, 반대로 나쁜 말을 하면 그 말대로 된다는 것이다. 미국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인 존 바그(J. Barg)는 “어떤 단어에 우리가 노출되면 뇌의 일정 부분은 자극을 받고, 무엇인가를 할 준비를 한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언어는 강하다. 말은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입을 통해 내놓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어느 면으로 보나 소모적인 갈등이다. 박근혜 정권 말기에 일어난 촛불시위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주의의 실천이었지만 지금의 둘로 갈라진 촛불은 대통령의 한사람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에서 비롯됐다. 오천만 인구 중에 검찰개혁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숱한 윤리적·법적 의혹을 지닌 단 한사람밖에 없다는 대통령과 여당의 주장이 국민을 분열시켰다. 조국 교수가 36일 만에 장관직에서 사퇴한 지금도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두 색깔의 촛불이 주말의 밤을 새우고 있다. 잘못된 인사를 덮
도서 평론가 이권우는 책 읽기를 각주의 책 읽기와 이크의 책 읽기 두 가지로 나눴다. 각주의 책 읽기가 자신의 세계관을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이크의 책 읽기는 자신이 미처 모르거나 다르게 알고 있던 것에 생각의 전환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각주’는 논문에서 서지를 밝히거나 개념을 설명할 때 쓰는 그 ‘각주’이고, ’이크‘는 놀랐을 때 내는 감탄사 그 ’이크‘이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것을 가까이하고 낯선 것을 멀
겨울밤의 일등성으로 맨 눈으로 보아도 붉은 별. 오리온자리의 알파별은 베텔게우스(Betelgeuse)이다. 일천만년이 별의 나이치고 많은 것은 아니지만 질량이 매우 큰 적색초거성인 이 별은 죽어가고 있다. 머지않아, 말하자면 약 백만 년 내에 베텔게우스는 초신성으로 폭발한다. 크기가 태양계의 목성 궤도에 필적하는 이 별이 폭발하면 보름달보다 더 밝게 낮에도 맨눈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몇주에 걸쳐, 길면 수개월에 걸쳐 빛나다가 장렬히 사망할 것이다. 내가 별의 일생과 베텔게우스의 죽음에 호기심을 넘은 학문적 관심이 생기게 된 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