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시민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는 눈과 시민의 목소리를 듣는 귀가 되어야 한다.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경험하여 알려주고, 보이지 않는 사실을 찾아 나서며 약자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입이 되어야 한다. 중대신문에는 독자들이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예술, 듣지 못했던 새로운 소식들과 관련한 기사가 올라온다. 때론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우리의 입이 되기도 한다. 독자들에겐 체험의 확장을 넘어 내 목소리를 대신해 주는 입까지 돼주는 셈이다. 중대신문 제2040호에는 ‘우리는 열일하는 老동자&rs
필자는 저널리즘 관련 강의를 하지만 언론에 대해 많이 지쳐있었다. 좋은 뉴스를 선택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노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중대신문은 언론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 사회면의 ‘청년(聽.)’ 코너는 중대신문에서 그리 긴 역사를 갖고 있진 않지만 지금의 청년들이 고민하고 논의할 수 있는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마약, 청년기 빈부격차와 불평등, 정신 건강, 정치, 노동 등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심층 기획 보도를 통해 전개해나가고 있다. 사회적 활동
지난 5월 15일자 중대신문 제2039호는 유독 더 풍부한 주제를 담고 있다. 학생들이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 사회와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마주해야 할 문제들을 폭넓게 담아놓았다. 우리 주변에서 빠르지만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다양하게 한 신문안에 대비되면서도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전체적인 주제의 구성을 살펴보자. 성소수자에서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룬 전시 ,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자본주의와 중앙대의 흔들리는 기초학문, 미래를 향한 연구소와 옛 시절의 서울캠퍼스 사진. 오늘을
로봇 저널리즘에 더해 생성형 AI가 기사를 쓰는 시대에 중대신문의 제2039호는 인간 기자의 존재 이유를 잘 보여주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어느 시대이고 인간이 잘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먼저 171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소수자 인식 조사 결과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나의’ 커밍아웃을 친구나 가족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데 긍정적으로 응답한 학생은 20% 미만이었던 반면 ‘내가’ 그들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한 응답자는 70%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현재 건대신문 편집국장으로서 우리 신문에 대한 고민을 몇 가지고 있다. 레이아웃을 어떻게 디자인하면 좋을지, 보도의 심층성을 어떻게 더 확보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더 읽히는 신문을 만들 수 있을지 같은 것들이다. 이번 ‘중대신문을 보고’ 기고를 맡아 받아본 중대신문 제2038호는 신문 편집에 대한 필자의 고민 속 귀감이 될 신문이었다. 기본을 훌륭히 지키는 신문은 빛난다. 3면까지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정돈된 종합면의 레이아웃과 아이템 선정이 모든 종합면 기사
기고를 위해 신문을 펼쳤을 때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지면이 수많은 토론과 조정의 언어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대표적으로 비건 학식을 다루는 기사가 그렇다. 해당 기사에는 무언가 필요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방향성이 섬세하게 적혀 있었다. 여기에서 확실히 하고 가야 할 지점이 있다면, 내 놀람의 주체는 다만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같은 학생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 움직임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리라.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타인에 대한 앎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리라.
요즘 수업을 듣고 있다.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런 말들이다. 이제는 전 세계 누구나 인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왜 현실에선 이토록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또 다른 수업에서는 “내 평생 큰길로 한 번 못 다니고···”라던 강제동원 피해당사자 할머니의 말이 마음을 콕콕 찔러온다. ‘언어가 그 삶을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 귓가에 선명하다. 장애인인권위원회 폐지 문제와 ‘인권복지위원회 체제개편안’이 메인 기사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이면서도 강력하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욕망은 인간 본성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바, 이는 경제적 풍요의 동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물질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은 과소비와 사치의 조장을 통해 사회를 병들게 한다. ‘물질적 부를 중시하지 말라’는 소크라테스의 절규를무시했던 아테네는 곧 멸망했고 로마 또한 위대한 제국 건설의 토대가 된 근검을 망각하며 무너져 내렸다. 우리 사회의 물질 만능 풍조는 매우 위험한 수준이다. 몇 달 전 한 매체를 통해 프랑스의 명품
입학한 지 어언 3년이 흐르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중대신문의 이름만 들어오다가 중대신문 제2036호로 중대신문을 처음 접하였다. 제 삶에만 매몰되고 있던 대학생에게 중고등학생 시절 국어 수업의 시험을 위해서나 외웠던 언론의 존재 이유를 알려준다는 듯이 신문의 글들은 훈계로, 때로는 공감과 위로로 다가왔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부터 집단 그리고 이 집단이 모여 만든 사회의 삶까지 다루고 있는 신문 덕에 잠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 그랬나? 대학생으로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기사는 중앙대생 정
중앙대 구성원으로서 캠퍼스 소식이나 학내 이슈 등이 궁금할 때면 늘 중대신문을 펼쳐보게 된다. 학교의 이모저모를 쉽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으로서 ‘공감’하고 학생, 교직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며 ‘소통’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오랜 구독자가 되었다. 지난 제2036호 중에서는 ‘심(心)에 쉼이 필요한 대학생들’이라는 기사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중앙대 재학생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해 다룬 것으로, 아마 많은 독자가 공감하며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았
기고를 의식하며 펼친 제2035호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학내 곳곳을 살피는 관심의 지면부터 학교 바깥의(하지만 우리의 바깥이라고는 할 수 없는) 슬픔과 희망을 담은 지면까지 다각화된 조명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미디어의 부정적인 영향을 강하게 체감하던 근래였는데 신문을 통해 긍정의 힘을 엿본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학교 폭력을 다룬 화제의 드라마 때문이었을까. 이번 호에서는 특히 학교폭력의 대학 입시 반영을 다룬 기사에 주목했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의식적인 노력과 제도적인 노력이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학폭 해결을
챗GPT(ChatGPT)의 운영원리는 간단하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토대로 딥러닝을 진행한 다음, 스스로 언어를 생성해 이용자를 위한 맞춤형 텍스트를 창작해낸다. 자료 조사와 취재를 기반으로 하는 '논픽션' 신문 기사의 경우, AI와 인간의 '대결'은 이제 더 이상 피하기 어렵게 됐다. AI 시대, 인간이 작성한 신문 기사는 AI가 작성한 신문 기사와 어떻게 차별화되어야 할까. 2021년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크리에이티브 논픽션과 플롯’이란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언론의 사
정보와 이슈가 너무도 빨리 퍼지는 시대에 주간으로 발행하는 대학 신문의 속보 비율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학보사들은 언론 매체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대신문’은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 중대신문 제2034호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긴 흐름의 기사가 많다’는 것이었다. 4·5면에서는 대학의 미래라는 주제, 8·9면은 유기견 문제를 다뤘다. 6면과 12면에도 한 주제로 한 면을 모두 채웠다. 긴 흐
지난해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은 작품 중 하나는 단연 이다. 많은 사람이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변호사의 이야기’라는 예민한 소재라서 인기몰이가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우영우는 소재적 우려뿐만 아니라 소위 스타 캐스팅도 아니고, 낮은 인지도의 신생 채널(ENA)을 통해 방영됨에 따라 흥행 요소가 없었지만, 첫 방송 직후 호평이 이어지며 기적적으로 시청률 상승을 이어 나갔다. 사랑스러운 우영우가 세상을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그동안 우리는 ‘장애/비장애’의 이분법적 시
어제저녁 나는 우편함에 쌓인 종이신문을 버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우편함에 쌓이던 읽히지 않은 신문을 버리는 건 꼭 경험하지 못한 하루를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구독 중인 신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종이신문은 시답잖아서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신문 속 내용과 나의 일상에서 거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신문 속에서 보이는 세상의 모습이 꼭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만 같았다. ‘나’를 빼고 돌아가는 세상에 당연한 일상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중대신문을 통해 나는 신문에서 나의 일상을 찾을 수 있었다
“기계가 인간의 뇌를 추월하는 날은 아직 요원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관련 기사를 일간지에서 읽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AI의 독자적 생각과 도덕적 사고의 부재를 거론하며 그 한계를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AI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어닥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월 6일에 발행된 중대신문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신문 2면의 ‘AI의 실수, 작품으로 재탄생’ 기사는 생성형 인공지능인 ‘StyleGA
종이 신문의 가치가 종잇장만 해지고 있는 가운데 미래를 이끌어갈 대학생들은 신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표한 언론수용자조사통계에 따르면 2022년 종이 신문 열독률은 약 9.7%이며 하루 중 단 3.3분을 종이 신문을 읽는데 투자한다고 밝혔다. 모바일이 활성화되면서 인터넷 포털을 통한 기사 소비가 급증하고 짧고 자극적인 것에만 몰두한 결과이다. '중대 신방'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널리즘에 대한 수업을 듣고 있는 지금도 신문은 여전히 낯설고 지루한 존재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중대신문 제
요즘 대화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ChatGPT이다. 에세이와 논문을 줄줄이 써낸다는 ‘그것’의 존재를 생각하면, 학생들의 글쓰기를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심지어 ‘그것’은 코딩, 작곡, 작문, 번역에도 능통하다. 참으로 신통한 도깨비 방망이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고민하고, 실패하고, 거듭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입력창에 궁금하고 필요한 몇 가지 조건만을 제시하면 고단한 모든 과정을 뛰어넘어 현명한 답을 단번에 가질
혹자는 기고문의 제목을 보며 의아할 수 있다. 제목의 ‘1mm’는 신문지 한 장의 대략적인 두께를, ‘40,075km’는 지구의 둘레를 수치화한 것이다. 신문지 한 장 속 지구촌이란 뜻이다. 그저 대학 언론이라는 이유로 교내 사안만을 기사로 다룰 줄 알았던 나는 이번 중대신문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교내와 국내는 물론 해외 관련 뉴스도 기사로 다뤘기 때문이다. 더욱이 흔한 해외뉴스가 아닌 ‘아이누족’이라는 소수민족 관련 기사여서 그런지 내 시선을 한참 동안 머무
독자에게 잘 ‘읽히는’ 신문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고, 둘째는 보고 읽기 편한 것이다. 중대신문은 매우 뛰어나게도 중대신문에서만 볼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지난 2031호만 보더라도 ▲흑석 9구역이 그리는 꿈, 실현은 언제? ▲탄소중립의 시대 … 중앙대의 현 위치는 ▲인구 과밀 사회, 서울의 숨통을 조이다 ▲권용태 시인 인터뷰와 같이 특색 있는 내용으로 지면을 구성했다. 대학 캠퍼스가 위치한 ‘지역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