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가을 나뭇잎 때문이다. 아파트 정문에서 후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넓은 도로 사이로 뒹구는 낙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사하기 위해 처음 들어가 본 집은 길가라서 조금 시끄러웠다. 그런데도 베란다 넘어 보이는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반해 하루 만에 계약했다. 십여 년이 지난 오늘도 집 주변의 나무는 한없이 푸르다. 이제 한 달 후면 자신의 온몸을 화려하게 털어내고 오로지 뿌리에 의지한 겨울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깨끗이 비우고도 봄이면 또다시 이 세상에서 가장 싱싱한 싹을 보여
오랜 시간 대학에 재직하면서, 참 많은 존경하는 선배 그리고 동료 교수님들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서 아마도 저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은 이제 머지않아 정년퇴임을 하시는 국어국문학과 이찬욱 교수님이십니다. 제가 언제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됐는지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직접 가까이에서 교수님을 뵙게 된 것은 교내 축구대회에 참여하게 된 15 ~ 16년 전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우리 중앙대에는 매년 가을 개교기념일 행사로서 이사장배 교내 축구대회가 열려 왔습니다. 교수팀, 의대팀, 직원팀 그리고 부속학교팀
20년 전, 나는 주거공간과 사무실로 사용해오던 2층 주택을 헐고 5층 다세대 주택을 지었다. 옥상 공간을 전용으로 사용하고 싶어 공용계단을 4층까지만 두었다. 4층 현관문에 들어서면 실내계단을 통해 5층으로, 5층 거실에서 옥상정원까지 이어지게 설계를 했다. 옥상정원은 거실의 높은 층고와 눈높이 이상의 가벽을 이용해 3면의 시야를 주변 건물로부터 차단하고 저 멀리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한쪽 면만 시야를 확보했다. 그 앞에는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다세대주택의 프로토타입에서 조금 벗어난 이 건물의 허가를 받는데 꽤나 애를 먹었
십수 년 전 나는 이곳 안성캠에 있었다. 매 학기 기말고사 시즌이 되면, 진도가 꽉 막혀버린 전공 실기 작곡 과제를 밤새워 작업했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자책하기도 하며, 재능의 부족을 시간으로 채우려는 듯 무수히 많은 밤 캠퍼스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밤거리를 걷다 보면 막힌 생각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튀어나오곤 해서 다시 작업할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캠퍼스 밤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나 나무가 보여주는 풍경 때문이었다. 사람이 없는 텅 빈 캠퍼스의 밤. 열기가 식은 거
얼마 전 고향에 가려고 KTX를 탔다. 뒷자리에 서너 살 정도 되는 아이와 엄마 아빠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은 시끌벅적한 여행이 되겠거니 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높고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저거 기차야?” 용산역에 줄지어 있는 기차를 보며 아이는 다시 소리 높여 물었다. “아빠 저것도 기차야?” “응 기차야.” 아빠의 반응은 시종일관 무덤덤했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잠깐 아이가 잠들었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2시간 내내 비슷
아빠는 지금 해파랑길 45코스의 시작점인 강원도 속초시 해맞이공원에 있다. 목적지는 장사항, 총거리는 약 17.5km이고 예상 소요시간은 6시간이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이 찌푸려져 있다. 신발 끈을 바짝 조이고 배낭을 고쳐 매고 긴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이어폰에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아껴 둔 정밀아의 1집 음악이 흐른다. 이제 걸을 준비는 모두 마쳤다. 출발이다. 네가 입학한 2020년은 오늘처럼 앞이 뿌옇고 우울한 습기가 대기에 가득한 날들의 반복이었지. 입학한 대학 근처도 제대로 못 가본 너에게 밥 약속, M
2년 만에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익숙했던 강의실이 2년간 면접이나 회의가 있을 때만 들어가는 곳이 돼 버렸다. 오랜만에 강의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토록 익숙했던 전자교탁도 어딘가 낯설고 마스크를 쓰고 만나는 학생들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개강하고 두 달여의 시간을 쌓아가는 동안 익숙한 감각을 되찾고 있다. 2020년 2월, ‘에버렉’이라는 프로그램을 깔고 웹캠을 컴퓨터에 설치하고 여러 종의 마이크를 구입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동영상 강의를 찍었다. 동영상 속 내
303관(법학관) 가는 길. 조그맣고 동그란 뒤통수에 시선을 빼앗긴다. 오후 3시, 햇살이 따뜻하고 바람도 적당하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급하게 걸어가던 길이지만, 그 작고 보드라운 뒤통수를 조금만 더 바라보고 싶다. 물론 급한 건 나뿐이고, 눈앞의 삼색 고양이는 느긋하다.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면서 털을 핥다가 잠시 내게 시선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금세 다시 나른한 졸음 속으로 빠져든다. 백철문학기념비 옆에서, 혹은 303관 앞 데크에서, 그리고 203관(서라벌홀) 근처에서, 종종 그 작고 나른한 뒤통수들을 만나게 된다. 느긋하
나는 아직까지 종교가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주(酒)님을 열심히 믿을 뿐이라곤 한다. 그러나 많은 종교에서 말한 좋은 금언은 언제나 마음을 맑게 하고, 정신을 살아있게 하므로 항상 읽고 기억하는 편이다. 그중 하나가 『코란』에서 말한 구절이다. 무하마드는 “인간의 진정한 재산은 그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행인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이런 의미의 말도 있다. “인생의 목적은 나의 기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쁨을 만드는 것이다.” 또 다른 말도 있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는 피천득 시인의 이라는 수필 중의 한 구절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활에서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들이 있다. 어떤 이는 지인들과 눈을 맞추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나누면서 활력을 느낄 수가 있고, 누군가는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적금을 보면서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나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소비자 행동에서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한다. 라이프스타일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중앙대와 나의 첫 만남은 15년 전, 어느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강 날 아침, 설레는 마음을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새내기 배움터에서 친해진 동기 몇 명을 청룡연못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강의실로 갔다. 그날 교수님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셨고, 우리는 미팅, 소개팅, MT, 동아리, 클럽과 같은 저마다의 캠퍼스 낭만을 이야기했다. 그 당시 우리가 꿈꿨던 대학 생활은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과 다를 바 없었고, 나의 첫 학기는 실제로도 그랬다. 나와 동기들은 밤낮으로 붙어 다니며 우
얼마 전 이사 온 동네에는 천이 흐른다. 천을 따라 난 긴 산책로를 걷다 보면 중대백로와 흰뺨검둥오리를 만날 수 있다.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던 비둘기 떼와 달리 이런 야생동물은 가까이서 볼수록 신기하다. 처음에는 왜가리나 청둥오리쯤으로 생각했는데 실은 독특한 수식어를 가진 백로와 오리였다. 흰뺨검둥오리 1마리가 가만히 있길래 조용히 다가가 후추 알처럼 까만 눈망울, 줄무늬가 나 있는 얼굴, 노란 부리 끝, 진한 오렌지색 다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청둥오리처럼 얼굴이 푸르지 않네’라고 생각하던 찰나 저만치 예닐
전쟁은 가공할 파괴와 참혹한 인명 살상을 초래하는 비극적이고 야만적인 사태다. 전투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물론 무고한 민간인들이 살상되고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됨을 우리는 수많은 전쟁 사례에서 목격해왔다. 그래서 전쟁의 비극을 막으려는 이들이 움직인다. 전쟁 발발 이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미·러 양국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고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물론 마크롱이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만 움직인 것은 아닐 터다. 복합적인 정치적 계산이 당연히 깔려 있을 테고 복잡한 국제정치 역학관계에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지 벌써 2년이 지나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소비행태의 변화와 소득·소비 양극화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소비 활동이 비대면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온라인을 통한 거래가 급증하였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전체 소매업에서 차지하는 온라인쇼핑 비중이 39%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온라인쇼핑에서 플랫폼의 영향이 커지며, 플랫폼 기반의 온라인쇼핑이 대세가 되고 있다. 또한, 비대면 시대와 함께 배달시장이 급성장하며 배달의민족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에서는 편견을 감정적, 인지적, 행동적 측면으로 구별하고 감정적 측면을 편견, 인지적 측면을 고정관념, 행동적 측면을 차별이라 일컫기도 한다. 세 측면이 서로 연관돼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공동체의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는 언어는 한마디로 ‘편견’의 언어라 부를 만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지나온 시간이 이러한 편견의 언어를 재확인시켜줬다. 하급자에게 ‘확찐자(‘확진자’를 소리대로 적은 것이나 코로나19로 인해 갑자기 살이 많
에버렛 테일러 치버는 6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14권의 소설을 썼다. 그는 소설로 127명의 인물을 만들어냈고 ‘적어도 자신은’ 모든 인물을 기억했다. 『게임을 망치는 자』. 치버가 ‘완성’한 소설 제목이다. 구상부터 정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배경, 취향, 외모까지, 심지어 눈동자 색까지 구상했다. 주제는 분명했고, 인물은 현실감이 있었으며 대화는 효과적이었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모든 게 치버의 ‘머릿속’에만 있다는 거
필자는 2016년 가을학기부터 다빈치교양대학의 인문학 교양 프로그램으로 라는 명칭의 강좌를 시작하였으니, 이번 학기로 6년 차를 맞이하게 된다. 대부분 3~4학년 고학년 차에 수강하였으니, 벌써 사회로 나간 수강생들이 많고, 가끔 사회생활에서의 와인과 기타 술에 대한 경험을 카톡에 적어 보내는 학생들도 많다. 수업은 맥주와 증류주, 사케 그리고 무엇보다 와인에 중점을 두어 강의하는데, 모든 술은 각자의 멋과 맛이 있다. 지난여름 30도를 넘는 폭염을 견뎌야 했던 나는 냉장고의 시원한 맥주 덕분에 열대야를 극복할
제목의 ‘아리’는 ‘아리아’를 뜻한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가? 어떤 의미로 들리는가? ‘아리아’는 인공지능(AI) 스피커를 부르는 이름인데, 그 이름을 불러 놓고 ‘착하다’는 느낌을 덧붙이다니, 이게 무슨 말이던가! 국어학 전공자로서 직업병(?)이 있는지라 주변 사람들의 언어생활에 관심이 많다. 위 문장은 올해 초, 제법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부모와 함께 가던 아이가 한 외침이다. 아이는 이제 막 말을 잘하기 시작한 듯했다
2012년 홍콩여행 중에 알게 된 한 유럽인의 역사적 견해는 필자의 강의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인이 일본에게 갖는 반감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식민지 방식이지만 일본이 고대부터 한국에 철기문화를 전수해주었고, 한국의 근대화에 일조했으니 역사적으로 본다면 한국인은 일본을 마냥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놀란 것은 이 논리에 일본의 고대사 왜곡인 ‘임나일본부설’이 마치 정설처럼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사실이
식당에서, 대중교통을 타다가, 타인의 이야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대화는 유독 투자에 대한 것이다. 투자 정보를 공유하고 투자 기법을 전수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영끌 투자’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었건 모든 일상, 대화, 그리고 생각을 투자 차익에 집중하고 있는 현상을 표현하는 데 ‘영혼까지 끌어모은 투자’라는 말 만큼 적절한 것은 없는 듯 하다. 영끌투자는 적절한 선택일까? 애석하게도 타당하다. 자산에는 내재가치가 있다고 믿어져왔다. 이 수준을 넘어 시장가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