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의 일이었다. 전 세계 많은 대학이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배움 봉사(Service Learning)라는 개념을 어떻게 인문학 분야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차에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응우엔 띠 푸옹 교수가 쓴 글 한 편을 읽게 되었다. 이 글에 의하면, 한국어 교육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교재들로 공부하여 한국어 시험의 최상위 등급을 받은 베트남인들조차도 현실적으로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 중 하나가 한국 사람들과의 대화 중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어휘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외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한국어 어휘
우리는 스스로를 직접 바라볼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때때로 거울을 본다. 자아도 그렇다. 제삼자가 되어 스스로 내 자아가 어떠한지를 관찰할 수가 없기에 타인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판단한다. 미국 사회학자인 찰스 쿨리가 창안한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라는 개념은 우리가 타인의 평가를 거울삼아 ‘남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나’를 내면화하며 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개념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나의 자존감으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데 쓰인다. 고등
옛날이야기 중에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어느 산골에 오누이와 어머니가 살고 있다. 하루는 어머니가 건넛마을에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난다. 호랑이는 어머니에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말한다. 호랑이는 처음 말과 달리 떡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떡을 모두 빼앗아 먹는다. 호랑이의 탐욕은 떡에서 끝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어머니에게 팔과 다리를 달라고 하고, 최후에는 몸뚱이까지 먹어 치운다. 호랑이는 이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의 옷을
고백할 게 있어요. 내가 지금 가르치는 수업들, 나도 학생 시절에 들었어요. 여러분들과 비슷했어요. 부담이 덜 해 보이는 강좌로 골라 신청했어요. 학교 밖에서 딴짓하느라 어찌나 분주했던지 수업은 잘 안 들어갔어요. 대충 시험을 봤고, 그저 그런 학점을 받았죠. 이 수업들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어요. 한 수업은 교수님의 점잖은 잔소리가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공부 다 마치고 아주 나중에 한참 후배로 다시 그분을 뵈었어요. 그제야 훌륭한 인품을 가지신 그 교수님께서 당시 진심으로 학생들에게 해주셨던 말씀이란 걸 깨달았죠. 다른 수업
여러분은 글의 중요성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실까요. 오늘 강단사색이란 작은 여백을 통해 글의 중요성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각 일부를 정리하여 다른 이에게 전하는 것이고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각 조각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입과 귀를 통해 전달되는 음성언어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고 스마트 기기의 발달과 더불어 시각과 청각적 정보가 가진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의 뒤편을 조금만 살펴보면 결국 글이 뼈대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은 말보다는 상대적으로
긴 코로나19의 터널이 지나고, 몹시도 낯선 대면수업 1년이 또 지났습니다. 교정에는 다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활기도 넘치고 있지만, 이전과는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라 느끼는 것이 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먹서먹함’이라고 생각되는 이러한 분위기는 무엇보다 학교생활에서 수업만큼이나 학생들의 성장에 중요한 요소였던 학생들과의 만남, 선배들과의 만남, 교수님과 학생들과의 만남 등 다양한 교류의 장이 줄어들며 단절의 담이 높아진 것이 큰 이유일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성장은 다양한 영향을 통해 이루어지고,
마흔 번째 봄이 나에게 오고 있다.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중앙대에서 맞이했던 봄. 그 때의 따스함과 냄새는 20년 세월을 훌쩍 넘어도 아직도 어제처럼 콧잔등에 남아있다. 설레었다. 키는 나와 비슷하나 왠지 모르게 더 커 보이는 선배들, 가파른 언덕배기 학교, 푸르른 청춘, 그 어느 하나 봄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깔깔대는 동기들의 웃음소리와 시시콜콜한 농담이 마치 봄 햇살 아래 지저귀는 노란 방울새의 울음처럼 시끄럽지만 마음의 안정감을 주었다. 어느 따스한 날에 공대에서 내려가는 가파른 언덕길에서 나는 첫사랑과 만났고 그
그러니까 그때는, 미래의 ‘나’를 믿고 있었습니다. 지난여름의 어느 날 원고 청탁을 받고, 넉 달쯤 뒤의 내가 이 글을 진작 다 써놓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정말로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많은 일이 밀려 있었고 미래의 ‘나’가 저절로 원고를 작성해놓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감 기한이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는 그야말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삼색펜을 딸깍거리고 몇 분에 한 번씩은 월드컵 축구 중계에 시선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세대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1992년) 때 복학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리에게 대통령이었다. 문화 대통령. 우리 대통령의 옷과 모자, 신발이 진짜 대통령의 그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달라서 멋졌다. 아, 역시 다른 것은 멋진 것이구나! 그때 알았다.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김광석. 문화 대통령과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문화 대통령이 진짜 대통령과 달라서 좋았는데 김광석은 문화 대통령과 또 완전 달랐다. 그래서 좋았다. 다른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구나! 그때 알았다. 나 군대 갈 땐 최백호
저는 학기 중 세 번 편지를 써서 학생들에게 부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부득불 강의실에서 대면 수업을 할 수 없게 됐을 때부터였습니다. 비록 이클래스 공지사항에 탑재한 짧은 온라인 편지지만, 수강생들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논리적이고 학술적인 의사소통 공간인 강의를 통해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었죠. 우리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청춘의 가치는 무엇인지 등과 같은 주제를 짧은 편지에 담아 보고 싶었죠. 강의에 열정을 바치기도 녹록지 않을 터인데 너무 오지랖이
내 꿈은 좋은 글을 쓰는 작가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알아보는 안목을 기르고 싶어서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였고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지금은 강단에서 글쓰기와 창의와 소통을 가르치면서 조금씩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수업을 하면 할수록 좋은 글에 대한 윤곽이 잡혀가는 것을 느낀다. 특히 학생들이 과제로 제출한 글들을 읽다 보면 ‘아, 이 글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글쓰기 과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한 학생이 쓴 자기서사 쓰기였다. 그 학생은 1000자 정도만 쓰라고 내준 과제를 A4 용지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 그는 자신의 유명한 에서 시인은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는 ‘투시자’가 돼야 하고 이를 위해 “모든 감각을 오랫동안 광대하게 그리고 이치에 맞게 착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가능한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토대 위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과 문학에 있어 요즘 용어로 기존 골조는 놔둔 채 일부만을 보수하는 ‘리모델링’이 아닌 전면적인 해체를 통한 ‘재건축’인 셈이다. 시인 랭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리고 안부를 묻는다. “잘 지냈어요? 어떻게 지내요?” “별일 없이 잘 지내요, 늘 똑같죠.” 그렇게 대화가 이어진 통화가 끝난 뒤, 문득 ‘나는 늘 똑같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떠올랐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늘 똑같을 리는 절대 없다. 아마도 뭔가 바뀌는 걸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무심결에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습관이라 할까, 익숙해지면 잘 바꾸지 않는다. 물건을 사면 망가질 때까지 쓰고, 같은 물건을 구해서 다시 쓴다.
그림책 작가 토미 웅게러의 유작 을 번역했다. 전쟁, 폭력, 공포, 혐오 등과 평생 정면 대결해온 그의 마지막 작품다웠다. 지구는 파괴되고 인류는 달로 이주한 종말론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웅게러는 역시 그답게 희망의 빛, 위로의 온기, 벅찬 사랑을 잊지 않고 점점이 남겨 우리가 찾아갈 길을 알려준다. 지구에 홀로 남은 인간 바스코는 자기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딱 때맞춰’ 위험을 피하며 나아간다. 낯선 ‘생명체’가 아내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를 들고. 그 아내는 갓 낳은
햇살이 따갑다. 삼삼오오! 교정은 다시금 청춘들의 물결로 넘쳐난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일상인가? 당연했던 일상을 다시 마주하니 반갑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지난(持難)한 과정을 이기고 그 일상의 주인공으로 씩씩하게 돌아온 청춘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많다”고. 그 “별별 일”을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몰랐다. ‘왜 이리 힘들지? 왜 나만?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속만 끓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한들?’이라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의 글을 자주 읽는다. 선생이 쓴 글들을 통해 시를 읽는 태도와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혼자 몰래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선생은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민음사, 2004)라는 시집을 낸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하다. 선생이 ‘아마추어 시인’인 표면적인 이유는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지만, 선생이 ‘아마추어 시인’인 근본적인 이유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마추어’의
이 칼럼(?)의 제목은 “강단 사색”이다. 그렇지만 사실 요즘 거의 모든 강의실에는 ‘이야기하는 단상’[講壇]이 없다. 그래서인가? ‘생각하여 찾는’[思索] 행위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낙천주의자이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단이 없어져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색이 싫어서는 아니다. 강단이 강요하는 일방성이 싫은데 그것이 사라져서 다행이고, 사색해야 하는 그 내용이 곱잖아서 싫은데 그렇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철학 분야에서 강단이 상징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가을 나뭇잎 때문이다. 아파트 정문에서 후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넓은 도로 사이로 뒹구는 낙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사하기 위해 처음 들어가 본 집은 길가라서 조금 시끄러웠다. 그런데도 베란다 넘어 보이는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반해 하루 만에 계약했다. 십여 년이 지난 오늘도 집 주변의 나무는 한없이 푸르다. 이제 한 달 후면 자신의 온몸을 화려하게 털어내고 오로지 뿌리에 의지한 겨울을 보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깨끗이 비우고도 봄이면 또다시 이 세상에서 가장 싱싱한 싹을 보여
오랜 시간 대학에 재직하면서, 참 많은 존경하는 선배 그리고 동료 교수님들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에서 아마도 저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은 이제 머지않아 정년퇴임을 하시는 국어국문학과 이찬욱 교수님이십니다. 제가 언제 교수님을 처음 뵙게 됐는지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직접 가까이에서 교수님을 뵙게 된 것은 교내 축구대회에 참여하게 된 15 ~ 16년 전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우리 중앙대에는 매년 가을 개교기념일 행사로서 이사장배 교내 축구대회가 열려 왔습니다. 교수팀, 의대팀, 직원팀 그리고 부속학교팀
20년 전, 나는 주거공간과 사무실로 사용해오던 2층 주택을 헐고 5층 다세대 주택을 지었다. 옥상 공간을 전용으로 사용하고 싶어 공용계단을 4층까지만 두었다. 4층 현관문에 들어서면 실내계단을 통해 5층으로, 5층 거실에서 옥상정원까지 이어지게 설계를 했다. 옥상정원은 거실의 높은 층고와 눈높이 이상의 가벽을 이용해 3면의 시야를 주변 건물로부터 차단하고 저 멀리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한쪽 면만 시야를 확보했다. 그 앞에는 작은 화단을 만들었다. 다세대주택의 프로토타입에서 조금 벗어난 이 건물의 허가를 받는데 꽤나 애를 먹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