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에 접어든 유럽 사회에서는 전통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욕구가 커졌습니다. 이 중심에는 오스트리아가 있었죠.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당시 미술계에서 시도하지 않은 구성으로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클림트를 뒤이은 에곤 쉴레(1890~1918) 또한 그만의 ‘아르누보(art nouveau)’를 선보였죠. 자 그럼,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아르누보’ 강연으로 들어가 볼까요? “각 세기마다 고유의 예술을, 예술에는
검은 천을 휘두른 채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과 눈이 마주치니 괴로움으로 인한 지침이 느껴집니다. 얼굴을 가득 채운 문자들과 시선을 사로잡는 총기에선 굳건한 의지마저 느껴집니다. 쉬린 네샤트(1957~)의 프레임에는 주로 이슬람교도 전통의상 차도르와 총기, 피부를 가득 메운 문자가 피사체로 담깁니다. 사진 속 등장하는 총기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 걸까요? 그가 사진에 담아내고자 했던 의지를 함께 살펴봅시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한 사람의 이란인으로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마주하는 이슈들 사이를 항해하는 것,그것이 내 작
아프리카, 무엇이 떠오르나요? 드넓은 자연 혹은 빈곤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인가요. 아프리카에 대한 편향된 인식은 아프리카의 현대미술을 쉽게 떠올리기 힘든 이유죠. 탄자니아의 두 작가 에드워드 사이디 팅가팅가(1932~1972)와 조지 릴랑가(1934~2005)는 이러한 편견을 깨고 아프리카만의 예술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보기 어려웠던 아프리카의 현대미술, 그 매력에 빠져보세요. “나는 내 땅 아프리카를 보여주기 위한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지녀온 것이다.” - E.S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출신 윌리엄 켄트리지(1955~)는 남아공 사회와 풍경을 자신의 그림에 담은 참여미술의 대가로 불립니다. 남아공 정치‧경제를 장악하던 백인임에도 그의 그림에는 인종차별, 인종분쟁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죠. 목탄으로 휘날리는 드로잉 속엔 그가 기대한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목탄의 고르지 못한 질감과 흑백으로 대비되는 색감 표현은 단순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강렬함을 드러낸다. 윌리엄 켄트리지는 이러한 목탄 드로잉 기법을 사용하여 아프리카의 암울한 역사를 담아냈다. 또한 그는 2차원적 드로잉뿐 아니라 다양한
멕시코 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분수령이 된 중요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억압받는 민중이 독재 체제와 외국 착취 세력에 대응해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작가 마리아노 아수엘라가 소설 『천민들 (Los de Abajo)』을 통해 드러낸 멕시코 혁명은 이러한 영광에 회의적입니다. 그는 자유를 향한 투쟁, 민중 해방 등의 이데올로기는 실제 멕시코 혁명 속에선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군의관으로 직접 멕시코 혁명에 참여했던 작가는 주인공인 데메트리오 마시아스의 삶을 통
‘비둘기와 코끼리.’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부부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겉모습부터 추구하는 미술 세계까지 모든 게 달랐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는 듯했던 둘은 모두 민족에 대한 애정과 혁명적인 예술관을 바탕으로 활동했던 혁명예술가였다. 멕시코의 예술과 정치를 나란히 이끌었던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벽화운동, 민중을 계몽하다 1900년대 초반, 멕시코는 격동의 시기였다. 디아스 독재 체제 아래 소수 특권층이 이익을 독점하고 농민은 착취당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이어졌다. 또한 디아스 정권은 외국
여성적인 말투와 몸짓을 가진 인물. 드라마 에 등장하는 게이 ‘쁘아송’이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이다. 이밖에도 대부분의 콘텐츠에서 게이는 소위 ‘여성스럽게’ 묘사된다. 마치 게이라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동성애자가 콘텐츠에서 획일화된 모습으로 다뤄지는 이유와 이로 인한 영향을 전문가와 분석해봤다. 동성애자는 다 똑같을거야 콘텐츠에 등장하는 동성애자의 모습은 전혀 다양하지 않았다. 대부분 비슷한 특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경수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콘텐츠에서 동성애자
나쁜 상상보다 나쁜 건상상조차 되지 않는 것'소녀'라는 틀에 매인여성 간의 사랑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말은 감히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불가능한 상황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상상되지 않는 것은 곧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콘텐츠는 사회의 상상을 드러낸다고 할 때, 콘텐츠에서 재현되는 것들은 ‘사회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말한다. 그리고 레즈비언은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다. 여자라서, 동성애자라서 게이가 정형화된 고정관념의 재생산으로 골머리를 앓고
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이번 주 클리셰는 바로‘동성애’입니다. 지난 25일 는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활동가의 강연 동영상을 비공개 처리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반발때문이었는데요.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동성애에 대한 터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콘텐츠에도 여전히 동성애는 비가시화되거나, 특정한 이들만을 부각시킨 형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벗은 몸을 ‘누드(Nude)’와 ‘나신(Naked)’으로 구분했다. 나신은 예술적 가치 없이 현실 그대로의 벌거벗은 몸을 의미한다. 하지만 누드는 예술의 옷을 입은 몸을 의미한다. 누드와 나신이 구분된 이유와 예술에 나타난 몸의 역사를 전문가와 함께 분석해봤다. 예술이라 쓰고 철학이라 읽다 아주 먼 옛날 인간의 신체는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예술 소재가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서 누드가 성행할 때도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당
“누드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감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벨기에 시인 카미유 레모니에는 누드가 뭔가를 감추려 하는 순간 음란해진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대로 누드는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한다. 작가의 생각을 전달하고 당대의 사회를 말한다. 18세기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누드작품이 전시된 에 다녀와 누드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누드, 이상을 담다 지금 막 하늘에서 추락한 듯한 남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세 명의 아름다운 요정. 허버트 드레이퍼
매 순간 인간의 몸은 움직인다. 뛰거나 걷고 있을 때는 물론, 가만히 누워 자고 있을 때도 인간의 몸은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기에 우리는 일상적 몸짓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짓은 그 어떤 글이나 그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전은 그 몸짓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전했다. 얼굴이 하는 이야기 남자의 얼굴에 몇몇 글자가 쓰여 있다. 그가 누구인지 식별이 가능한 모습이다. 남자의 얼굴은 존재만으로도 그의 신원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
괴물로 돌아온 여성에게공포영화보다 무서운건 현실이었다 보통 귀신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처녀 귀신’의 이미지다. 하지만 실제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 중 여귀가 나오는 서사는 「장화홍련전」과 ‘아랑 전설형 설화’로 대별될 만큼 그 종류나 수가 많지 않다. 한국의 대표 귀신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처녀 귀신이 귀신의 표상이 된 것일까. 나아가, 왜 한국에선 여성들이 귀신이 된 것일까. 억압 속에서 돌아오는 것은 이에 답을 하기 위해선 인간이 무엇에 공포를 느끼는지 알 필요
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습관처럼 쓰이는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 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이번 주 클리셰는 바로‘여성괴물’입니다. 여러분은 '귀신'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부터, 머리를 풀어헤친 처녀 귀신까지. 수많은 여성 귀신들의 이미지가 떠오르실 텐데요. 왜 '보통의 인간'은 남성으로 상상되는 반면 '보통의 귀신
아빠가 아빠가 되는게 재미있는 세상 ‘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사진 시리즈가 SNS상에서 화제가 됐었다. 편안히 TV를 보기 위해 아이를 벽에 붙여놓는다든가, 아이에게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장난을 치는 사진들이 주를 이뤘다. 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기면 ‘이런 꼴’이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이의 조합이 특별한 것이 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유달리 아버지의 육아가 자주 보이는 곳이 있다. 바로 TV 예능이다. 최근 나,
사랑과 희생은어머니의 본능이 아니다 ‘인형 옷 입히기’는 인형에게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히는 놀이다. 인형이 입는 옷은 전적으로 옷을 입히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옷이 입혀지더라도 인형은 그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모성애의 모습과 유사하다.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애’라는 옷을 입힘과 동시에 어머니는 미소 띤 자애로운 얼굴을 한 채로 사랑과 헌신으로 무장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여성은 ‘모성애’라는 옷을 입게 됐으며 이는 여성에게 어떤 억
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 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이번 주 클리셰는 바로‘모성애’입니다. 흔히들 모성애는 본능이라고 얘기합니다. 열달 동안 한 몸이었기에 어머니와 자식 간엔 아버지가 절대 알 수 없는 유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죠. 하 지만 과연 모성애가 본능일까요? 왜 미디어에서 어머니는 숭고하거나 기이한 형태 로 드러날까요? 엄마라서 그래야 하고엄마라서
‘두 여인을 화합시키기는 것보다 유럽 전체를 화합시키는 편이 쉽다.’ 루이 14세가 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면 루이 14세는 당장에라도 유럽 전체를 화합시켜야만 했다. 여성들은 서로 연대해 여러 가지 의미를 이룩해 나가고 있고, 이러한 모습이 콘텐츠에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콘텐츠 속 여성 간 연대를 들여다봤다. 함께할수록 선명해진 ‘나’ 는 드물게 멤버가 모두 여성인 예능프로그램으로, 꿈에 투자하는 계모임 ‘꿈계’를 통해 서로 돌
흐려진 본질 위싸우는 여성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헤라. 하지만 제우스의 끊임없는 불륜에 골머리를 앓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그를 ‘질투의 화신’이라 부른다. 그의 모든 처사 또한 질투로 함축되고 그 대상은 제우스의 불륜 상대에게 한정된다. 제우스의 권력이 절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우스 옆의 여성만을 응징할 수밖에 없던 헤라의 사정은 질투라는 이름 아래 가려질 뿐이었다. 작은 파이 위의 결투 인터넷 커뮤니티 속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글엔 ‘여적여 어디 안
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이번주 클리셰는 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여적여)’ 입니다. 수많은 콘텐츠에서 여성캐릭터는 질투하며 서로를 적대시하는 존재로 그려져왔죠. 미디어 속에서 여성이 ‘여적여’구도로 묘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여성의 적은 여성일까요? ‘여적여’ 클리셰를 분석해봤습니다. 여주인공은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