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을 보존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순간을 기억 속에 담아두거나 사진이라는 기록물로 남기는 것이다. 굳이 흐릿한 기억력에 의지할 필요 없이 요즘은 너도나도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뿐만 아니라 맛있는 음식, 마시는 커피까지 사진으로 남기곤 하는 것이다. 사진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오중석 동문(사진학과 94학번
안녕하세요. 기계공학부 09학번 윤경배입니다. 이렇게 인사하니 마치 중앙대라는 고향에 온 것 같네요. 저는 학부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때의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2학년 시험기간 때 해방광장에서 우연히 이상형의 여학생을 봤어요. 빛이 나더라고요. 그때 저는 시험기간에 임하는 여느 공대생이 그렇듯 츄리닝 바지에 삼선슬리퍼를 신고 머리에
우리는 왜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는 걸까요?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현재 교육법인을 창업하여 운영하고 있다 보니 많은 청소년 및 대학생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는 유독 매사에 적극적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금방 회복한 뒤에 다시 도전하죠. 이런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존감’이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자영업자 수가 약 539만 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청년들 사이에서 ‘나도 치킨집이나 해볼까?’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만큼, 창업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신규 자영업자들이 3년 안에 폐업하게 되는 수치도 무려 55%에 달한다. 창업의 진입장벽이 낮은 만큼, 소위 ‘망할’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7시 뉴스입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할 때 즈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다. 특유의 절제된 목소리로 대한민국의 저녁 7시를 책임지고 있는 김진희 동문(응용통계학과 98학번)은 2004년 KBS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해 ‘사랑의 리퀘스트’, ‘세상은 넓다’, ‘생로병사의 비밀’ 등 지금까지 약 17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
학부와 석사과정, 중간에 군 생활까지 10년을 흑석동에서 학생 신분으로 지냈습니다. 서른을 기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이제 저는 6년 차 직장인에 30대 중반입니다. 지난해에는 결혼까지 하며 다른 기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라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만 봐도 ‘내가 변했나?’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억울하기도 합니다. 변하지
일종의 위장이 아닐까. 작은 키와 재치있는 입담으로 8,90년대를 종횡무진 했던 그였지만, 사실 이것들은 그가 진짜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잠시 쓰고 있는 가면일지도 모른다. 이홍렬 동문은 78년 ‘산울림 콘서트’로 데뷔한 후 ‘청춘 만만세’, ‘귀곡산장’, ‘이홍렬 쇼’, ‘한다면 한다’ 등 100여 개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준 대한민국
많은 후배들의 고민거리가 취업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졸업생으로서 도움이 되는 말들을 가득 전달해 주고 싶지만,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취업에는 정답이 없고 취업을 했다고 해서 누구에게 알려줄 만한 특별한 비책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 저의 학교생활과 지금까지의 짧은 회사생활을 돌이켜보며 스스로 가장 아쉬웠던 두 가지 내용에 대해
‘116만 명’. 뉴스에서 본 듯한데, 무슨 숫자일까. 바로 우리나라의 잠재적인 청년 실업자 수다. 울산광역시 인구와 똑같다. 울산시에 사는 이들이 통째로 백수라는 얘기다. 무섭다. 저 수치보다 청년 실업자 수가 훨씬 낮았을 때 필자도 ‘청년 실업’의 한 귀퉁이에 있던 대학 졸업반 또는 대졸 백수였다. 당시에도 자괴감이 들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저 지경이니,
2015년 미국의 한 경제지가 꼽은 최악의 직업으로 ‘신문기자’가 선정됐다. 높은 업무 강도, 오피니언 리더 역할의 축소 등의 이유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이다. 과거만큼 신문기자에 대해 젊은이들이 갖는 인식이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이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버텨내기 힘든’ 만큼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천대받을 수 없는 공익적 직업이기도 하다
1990년대는 한국 농구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한기범 선수는 이 시기 최고의 주가를 올리며 국민들의 각광을 한 몸에 받는 인기스타였다. 그는 1996~199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농구코트를 떠났다. 은퇴 후 서울 구로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지낸 그는 한동안 몸과 마음 모두 힘든 시기를 보냈다. 선천성 질환인 마르판 증후군을 겪으며 20
중앙대학교 교내 영신관에 걸린 플래카드, ‘그대의 선택, 더할 나위 없었다!’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2014년 tvN에서 방영한 ‘미생’이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 비정규직 직원인 장그래를 두고 한 말을 변형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중앙대학교를 선택한 신입생들에게는 입학을 환영하는 의미와 함께 ‘최선의 선택’을 했음을 새삼 일깨우는 표현일 것이다.
사르트르가 어느 시인의 말을 빌려 ‘인간은 인간의 미래’라고 이야기했을 때 지향해야 할 인간상을 염두에 뒀다면, 오늘날 TV에서 ‘사람이 미래’라는 말을 접할 적에는 전연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궁핍한 시대’에 상대적으로 일찍 희생당한 자들의 삶이, 아직 남아있는 자들의 미래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연상은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까
당신은 이미 그를 알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의 시를 알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수업시간에 교수님 얼굴만큼 페이스북을 자주 보는 이들이라면 그의 시를 못 봤을 리 없다. 빳빳한 종이에 투박한 손글씨로 쓰인 그 시 말이다. 힌트가 더 필요하다고? 제목은 ‘한 스푼’. 그 아래로 ‘누군가 나에게/아메리카노를 주었어/나는 쓴 커피를 안 좋아하는데/시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