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갑다. 삼삼오오! 교정은 다시금 청춘들의 물결로 넘쳐난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일상인가? 당연했던 일상을 다시 마주하니 반갑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지난(持難)한 과정을 이기고 그 일상의 주인공으로 씩씩하게 돌아온 청춘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많다”고. 그 “별별 일”을 내가 청춘이었을 때는 몰랐다. ‘왜 이리 힘들지? 왜 나만?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속만 끓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한들?’이라
막연한 동경을 갖고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수업을 들으며 언론 활동에 있어 나름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됐다. 첫째, 윤리적으로나 질적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럽지 않은 콘텐츠를 만들 것. 둘째, 제작자의 주제 의식에 사로잡혀 뉴스에 앞서 휴머니즘을 잊지 않을 것. 중대신문은 어떨까. 인상 깊었던 부분은 중앙대 학생들의 삶에 밀접한 사건을 선정해 여러 기획 기사를 구성한 점이었다. 마감 기한과 분량이 정해져 있는 기사의 특성상, 소위 말해 인스턴트식의 찍어내기 기사가 만연한 옐로 저널리즘의 홍수 속에서, 대학 신문에
지난 3일, tvN에서 드라마 이 처음 방영됐습니다. 화제가 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은 가난하지만 우애 깊게 자란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맞서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핵심 줄거리처럼 작중에는 ‘돈’ 이야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특히 드라마에선 주인공을 비롯한 여럿의 주요 인물들이 부모 혹은 이전 세대의 재산 수준에 의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강조되는데요. 에서 직접적으로 해당 단어가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
활기가 가득한 캠퍼스를 거닐고 있으면 착각이 든다. 코로나19가 끝난 게 아닐까? 현재 중앙대 캠퍼스는 학구열을 비롯한 열의로 한껏 밀집되어 있다. 이전 일상으로의 회복은 물론 긍정적 현상이지만, 그것이 과거로의 회귀라 할지라도 변화는 매번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개강 3주차 캠퍼스는’ 기사에서 캠퍼스 속 세태 변화를 낱낱이 짚어내고 있다.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서로에게 너무도 적응해버린 탓일까. 세월의 지남을 동반한 이상 더는 과거의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섣불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총 6명. 현재 안성캠에 재학 중인 장애 학생의 숫자다. 캠퍼스는 그들의 안전한 눈과 귀가 되고 있을까. 비장애인에게는 크지 않은 결함이 장애인에게 생각지 못한 결손을 야기할 수 있다. 배려가 닿지 못한 곳은 아직도 많다. 훼손된 점자블록이 그 대표적인 예다. 발바닥의 촉감으로 위치와 방향을 알 수 있도록 표면에 돌기가 나 있는 점자블록은 시각 장애인의 안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중 일자 모양의 돌기를 가진 선형 점자블록은 시각 장애인에게 일정 거리까지의 보행 방향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지표가 돼준다. 그러
밈처럼 유행하는 이 말은 모두가 쉴 틈 없이 바쁜 현대 사회를 강조하고자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 말이 우리 사회 전반을 정말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대학이라는 큰 사회에 발을 뻗었을 때부터 나의 친구들은 모두 바쁨의 정도를 넘어선 일과들로 치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항상 더 많은 일을 만들어 내고 쉬는 것을 불안해하며 바쁜 것을 당연히 여겼다. 대표적인 이유로는 쉬는 그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에너지가 소모되면 밥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열심히 일하면 잠시 쉬어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언제부턴
‘바이라인’. 중대신문 기자가 되어 처음 알게 된 단어입니다. 중대신문의 모든 기사 끝에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과 메일 주소를 적습니다. 제 이름이 적힌 바이라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설렘을 잊지 못합니다. 비록 짧은 기사였지만 그 끝의 이름 석 자가 주는 낯설고 좋은 기분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름이 주는 힘은 강합니다. 많은 사람이 익명 또는 실명의 무언가를 원하는 이유도 이름이 주는 힘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 사회에서는 익명의 힘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올해 초, 새내기로서 설레는 마음을 안고 흑석동에 왔습니다. 다른 동기들보다 한 살이 많았고, 처음 겪는 대학 생활이라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습니다. 부담과 압박감으로 인해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긴장하는 나날들이었죠. 그런 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303관(법학관) 앞에 걸린 중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현수막을 보고 지원했고, 지금은 한 달 된 ‘초보 정기자’로서 열심히 활동 중입니다. 얼마 전 캠퍼스 길거리에 서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게릴라인터뷰가 기억에 남습니다. &l
여기저기 별점이 매겨져 있습니다. 어딜 가나 쉽게 마주할 수 있죠. 책을 사려고 해도, 영화를 보려고 해도,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말입니다. 별점을 보고 시간 및 비용 낭비할 일을 줄일 확률이 높으니 편한 세상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습니다. 필자 또한 남이 매긴 별점을 잘 수용하는 편입니다. 나보다 먼저 경험해 본 이들의 조언과도 같으니까요. 가고자 했던 음식점이 별 5개 중 4개 이상을 채우지 못하면 잘 찾지 않고, 궁금했던 영화가 10점 만점에 7점 이하의 평가를 받으면 웬만해서는 보지 않죠. 굳이 실험적인 도전을 하는 것보다야
14일 신당역의 한 역무원이 흉기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지난해부터 피해 역무원을 스토킹하던 피의자였다. 스토킹 범죄로 재판에 넘겨져 선고가 예정된 상황에서 피해자를 피습한 것이다.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에 관한 안일한 태도와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하지 않은 무책임이 빚은 문제다. 해당 역무원을 향한 스토킹과 불법 촬영 등에 대해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이 기각했다. 결국 피해자는 여러 차례 가해자의 협박성 연락에 시달려야 했다. 여성가족부의 「2021년 여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스
‘0’. 이번 안성캠 3분기 학생 간담회(간담회) 참석 신청자 수다. 신청 기준 인원 15명은커녕 신청자가 없어 간담회 개최는 취소됐다. 학생과 총학 모두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간담회는 학생들이 통학 버스 증차와 생활관 시설 개선 등을 총학에 직접 요구할 수 있는 자리다. 학생자치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없인 발전도 권리행사도 불가하다. 학생 스스로가 아닌 그 누가 대신해서 학생자치를 위해 노력하겠는가. 총학의 공약과 정책을 살펴 학생자치를 발전시키기 위해선 총학과 학생 간 활발한 소통이 선행돼야만 한다. 3분
입학 이후 중대신문의 기사를 꾸준히 챙겨본 나로서는 기고자로 참여하는 것이 상당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중대신문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중앙대생이 자치적, 주체적으로 하나의 단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다수가 외면하고 있는 작은 문제들 또한 빠짐없이 날카롭게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해 해결을 촉구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인상 깊게 읽었던 기사는 “어느 날 갑자기 집을 구해야 한다면”의 학교 주변에서 자취방을 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과 생활 속 알아
국내 대학 최초의 대학신문으로 창립 75주년을 축하드리며, 본교 동문으로 그리고 재직하는 교수로서 중대신문이 자랑스럽다. 지난 75년간, 세상이 변하면서 대학신문의 지면도 변화를 보여왔다.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스마트한 세상으로 바뀌면서 종이 신문에 대한 관심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 사회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지면을 통해 학생들에게 생생한 학교 및 지역 그리고 사회 정보와 함께 우리의 지성을 일깨우는 글로 유익을 제공하려는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대학 내 생생한 정보와 지역 그리고 사회의 주요 뉴스와 이슈들에 대해 전하고 짚어주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찾는 일을 대학 생활 과업으로 삼고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올해도 절반이 훌쩍 지났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태까지의 방학이라고 한다면 다음 학기의 공부를 미리 예습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복습하는 데 열정을 쏟곤 했는데 수험생활에서 해방돼 일명 ‘아무런 계획 없는 방학’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설렘과 함께 조금의 걱정도 됐었다. 방학뿐만 아니라 앞으로 여행을 많이 다닐 예정이다. 해외여행도 물론 좋지만, 아직 한국에서도 못 가본 여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의 글을 자주 읽는다. 선생이 쓴 글들을 통해 시를 읽는 태도와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혼자 몰래 마음속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선생은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민음사, 2004)라는 시집을 낸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하다. 선생이 ‘아마추어 시인’인 표면적인 이유는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지만, 선생이 ‘아마추어 시인’인 근본적인 이유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마추어’의
이 칼럼(?)의 제목은 “강단 사색”이다. 그렇지만 사실 요즘 거의 모든 강의실에는 ‘이야기하는 단상’[講壇]이 없다. 그래서인가? ‘생각하여 찾는’[思索] 행위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낙천주의자이기에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단이 없어져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색이 싫어서는 아니다. 강단이 강요하는 일방성이 싫은데 그것이 사라져서 다행이고, 사색해야 하는 그 내용이 곱잖아서 싫은데 그렇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철학 분야에서 강단이 상징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채식, 성평등, 고용불안정, SPC 불매, 경제 상황, 아이돌 등등… 이러한 관심사에 강제는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늘 당위를 부과해서라도 주장하고 싶은 관심사가 있다. 바로 ‘환경 문제’다. 현대의 우리는 ‘환경 문제’라는 키워드 자체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 혹은 더 어렸을 때부터 환경파괴로 인해 미래에 닥칠 위험성에 대해 교육받아 왔다. 그렇기에 심각성을 인지한 몇몇 사람들은 일명 탄소 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