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속 명준은 냉소적인 리버럴리스트다. 명준은 헤겔을 “바이블에서 먼저 역사적 옷을 벗기고, 다음에 고장 색깔을 지워버린 후, 그 순수 도식만 뽑아냈다”고 냉소한다. 마르크스를 “여기에 경제학과 이상주의의 옷을 다시 한 번 입혔다”고 조소한다. 나아가 당시의 정치와 경제도 비웃는다. 그는 세계를 경멸한다. 그가 마주한 남한의 현실은 고독과 외로움의 울
“이 책은 실제로 우리가 지금 홀려 있는 과학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영원히.”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해 이언 해킹이 쓴 서문의 문장이다. 저자 토마스 쿤은 과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바꿨다. 그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답변한다. 과학에서 왜 역사가 중요한지, 과학은 왜 과학 공동체만의 전유물이 되는지, 과학을 왜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되는지 말이다.
한 원로 철학 교수님과의 점심식사 자리였다. 이번학기 매호 기고문을 작성해주시는 분이었다. “편집장님은 매주 그렇게 글이 나오세요? 저는 매주 기고문을 쓰는 게 꽤 큰 부담이 됩니다.” 연륜과 학식에서 비교가 안 되는 교수님의 난처한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재빨리 다른 주제로 화제를 넘겼다. 나름대로 훈련받아왔다던 글쓰기지만 커서의 깜빡임 앞에
어스름한 일몰 무렵 가을바람을 느끼며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꺼내본다. 때는 BC 399년. 지중해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쪼이는 대낮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 한복판에서 벌어진 한 지식인에 대한 재판 과정을, 플라톤은 그렇게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참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다던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말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점차 타락
서로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일상화된 오늘날. 곳곳에선 분노에 찬, 억울함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억울해 죽겠어!”, “무시하지 마.”, “지는 그렇게 잘 났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개인의 자존감은 처참히 내팽개쳐집니다. 남을 공격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TV 예능프로그램에서는 타인을 향한 공격과 비난으로 점철되어야
말들이 쏟아집니다. 우리는 주워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쏟아지는 말의 폭포수 속에 살아가죠.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확성기를 틀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일부 언론은 사안을 이리저리 왜곡하며 말들을 만들어내죠. 추문과 소문은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갈등의 실타래를 만들어냅니다. 말의 홍수.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 중 하나죠.
『1984』의 하늘은 잿빛으로 그려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조지 오웰 자신의 마음이 어두웠다. 부인이 죽고 자신도 폐결핵 3기를 선고받은 뒤였다. 전기도 전화도 안 통하는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에서 『1984』가 쓰인 해는 1948년이었다. 뒷자리에 두 수를 뒤집어 그는 ‘1984’라는 제목을 달았다. 『1984』의 배경은 공산혁명 이
고요한 못에 내던져진 나뭇잎 한 장이 일으킨 파문은 때론 예견된 해일보다 크게 느껴지곤 합니다. ‘고령화 사회’는 이미 상투적이 돼버린 예견된 인구론적 해일이죠. 반면 가족의 위기론은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그곳, 바로 그곳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전·현직 검사장이 연루된 ‘법조 비리’ 사건보다 남의 가족사가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