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중대신문에서는 다빈치캠의 봄맞이 문화행사 소식을 전했다. 봄의 전령쯤으로 여겨지는 벚꽃이지만, 공연동아리에게 만큼은 예외가 아닐까. 벚꽃이 피기 전 신이화에 눈이 쌓일 때부터 시작되는 공연동아리의 봄공연에 대해서 얘기해보려 한다. 중앙대의 봄공연은 개나리 무성한 3월부터 철쭉 피는 5월까지 바쁘게 진행된다. 봄공연을 준비하는 공연자들은 겨울부터 팀을 꾸리고 합주 연습에 들어간다. 밖은 눈이 오고 춥지만, 합주를 하다보면 금방 공기가 데워져 창문을 열 정도로 땀이 나기도 한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시쳇말이 있듯 개나리의
중대신문 제2060호는 1면 커버스토리와 4~5면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총선)특집에 할애했다. 학교를 대표하고 지역을 다루는 신문으로서 마땅히 크게 다룰만한 주제였다. 그렇기에 아쉬움이 더 컸다. 우선 각 후보자의 인터뷰가 너무 짧아 출마 소감이나 핵심 공약처럼 뻔한 질문으로만 기사가 구성됐다.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자에게 물어볼 게 고작 그뿐이었을까. 특히 동작구을은 서울특별시의 주요 요충지였기에 기성 언론의 보도에서 전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공약의 재원 확보 방안, 공약에 없는 주요 사안들까지 폭넓게 물어봤어야 했다.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총선)를 앞두고 중대신문은 이번 총선 규칙 2가지를 설명했다. ‘소선거구제’ 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같은 어휘가 익숙하지 않을 많은 독자를 위해 기사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소선거구제는 하나의 선거구에서 한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방식이다. 많은 표를 얻은 자가 대표가 된다는 점에서는 명확한 장점이 있지만, 낙선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표는 사표(死票)가 된다는 단점이 있는 제도이다. 반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앞선 사표가 사장되지 않도록, 득표율과 의석수 균형을 맞춰주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정
모든 이들은 저마다의 기대를 안고 산다. 대통령에 대한 기대, 국회의원에 대한 기대, 대학 총장에 대한 기대를 비롯하여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에 대해 크고 작은 기대를 갖고 있다. 중대신문사 기자로부터 라는 칼럼을 부탁받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우리 ‘중대신문’을 읽었다. 중대신문은 ‘대학 문턱에 선 1.37%의 존재’라는 기사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대학의 현주소를 비판적으로 알렸다. 10일에 이뤄지는 국회의원 선거와 청년 정치 참여를 통한 대한민국의 발전을 다룬 분석적 기사는 주요 일간지와 비교해도
길이 들지 않은 새 신을 신으면 으레 뒤꿈치가 까지기 마련이다. 바뀌는 것들에 나를 맞추고 때로는 변화를 내가 길들이기도 하는 시간이다. 연도에 3이 아닌 4라는 숫자를 쓰는 데 익숙해지고, 이에 맞춰 우리는 한 살을 더 먹는다. 3월 또한 그렇다. 새로운 학기에 바뀐 시간표를 보고 강의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따스해진 햇살과 함께 옷은 점점 얇아진다. 새 옷과 새 책, 이것들만의 낯선 향기가 좋다. 이처럼 ‘새것’이라는 말은 우리를 설레게 한다. 중대신문 제2058호 속에는 새 학기를 맞은 학교의 소식들이 실려있다. 새것들을 조명
2023년 8월 한국언론학보의 한 논문에서는 50년간의 한국기자상 심사평을 분석하여 한국 언론이 추구한 저널리즘 가치를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논문에서 꼽은 으뜸 가치는 ‘사회변화 주도’였다. 중대신문도 이와 다르지 않은 가치를 보여주고 있어 고맙고도 자랑스럽다. 종합면의 학내 인권센터 기사와 인권 주제 사설은 ‘당위’로만 외쳐지고 ‘당연’이 되지 못한 인권 보호의 실상을 보여준다. 인권센터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는 현실을 현장의 목소리들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8세기에야 ‘발명’한 것이 인권이라 해도 현재의
지난 호의 중대신문을 살피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신드롬을 다룬 기사를 읽게 되었다. ·부터 까지. 출연자들의 롤러코스터 같은 격렬한 감정에 과몰입하며 재미를 느끼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타인의 감정을 예능으로 손쉽게 즐기고, 화면 속 모습만으로 너무나도 ‘진짜’ 같은 미움·안쓰러움·설레임 등의 감정을 느끼는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다. 드라마·영화는 시청자들이 콘텐츠가 가상이라는 전제를 인식하게 한다. 반면 리얼리티는 내가 보는 것이 무조건적인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울타리를 형성해 과몰입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끼니’와 관련한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이는 ‘어제의 끼니가 오늘의 끼니를 대체하지 못한다’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다. 지난 호 중대신문 1면은 ‘점심은 먹고 다니십니까’였다. 중앙인의 숙명과 같은 끼니의 문제를 다루었다. 대안을 모색한 기자의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서윤호 기자는 서울대에서 식당 혼잡도를 공유하는 것과 연세대에서 학식 사전주문이 이뤄지는 사례를 들어 혼잡도 개선 가능성을 탐색했다. 이에 비
대학교에서 다섯 번째로 맞는 3월은 아직도 낯설다. 처음과 두 번째 3월은 침대에서 노트북 화면을 보며 지냈고, 세 번째 3월엔 조급함에 목적 없이 빈 캠퍼스를 밟았다. 네 번째 3월에야 캠퍼스에 불어오는 바람을 자연스레 맞았고, 오늘로써 나는 이 소란스러움을 온전히 등에 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앙대의 땅을 밟으며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회고하자면, 조금은 피곤한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모든 사람과 비슷하게도 나의 삶은 의무로 가득 해왔다. 모든 일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라는 수직선 위에 빼곡히 놓여 있었고, 하
새 학기가 시작된 3월 11일 자 신문을 받아보았다. 코로나의 여파가 잊히기 시작한 이제서야 봄의 초입을 조금은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된 듯하다. 많은 단절을 초래했던 감염병의 시기가 지난 후, 봄의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낯익은 모습들이 한층 뜻깊게 다가온다. 지면에 게재된 인문대의 새터가 4년 만에 부활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통해 이제는 교내 곳곳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신학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또 온라인 플랫폼에 관한 기사는 그간 간과했던 소비생활의 실태에 관해 경각심을 일깨워주었고 건강한 소비생활에 개인의 노력
얼마 전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세트(Sete)에 다녀왔다. 우리나라라면 고급빌라나 5성급 호텔이 있을 법한 전망 좋은 언덕 위에 묘지가 있다. 이름은 ‘해변의 묘지’. 해변은 죽음보다는 휴가, 젊음, 열정에 어울리는 곳이다. 피카소는 여인들이 해변에서 춤을 추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마티스는 니스 해변 창밖 풍경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 라울 뒤피가 그린 해변은 눈이 시리게 푸른색의 향연이다. 세트에서 태어난 시인 폴 발레리(1871 -1945)는 어린 시절 가파른 언덕에 자주 올랐다. 묘지에서 하늘과 바다를 마주하고 서면 역설적으로
동경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는 요즘이다. 동경, 그것은 애쓰는 마음이다. 수없이 누군가를 생각하고 바라보는 일이기에 그 마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동경을 느껴야 내 마음이 잘 쓰이는 것인지 고민하곤 한다. 그런 지점에서 사람들이 어떤 이들을 동경하는지 유심히 살핀다. 종종 SNS와 베스트셀러 목록 사이에서 사람들의 동경하는 모습을 본다. 대개 수백억의 자산가, 이른바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그들은 단편적인 성공에 취한 채 자신이라는 위대한 방법론을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일부는 총학생회를 정치권에 비유한다. 결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유권자를 위해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후에는 그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그둘은흡사하다. 민주적인 절차를 포함한 총학생회의 선출과 업무의 이행이라는 하나의 길 안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후보단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빛에는 공약 이행 여부라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표심이 우선인 몇몇 후보들은 턱도 없는 공약을 내걸기도 하고, 모든 공약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중대신문 2054호를 통해 양캠 2023
평화를 기원하는 문학 행사에서 팔레스타인의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를 만난 일이 있다. 행사가 있기 5일 전, 그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리베라투르상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공격하자 주최 측은 일방적으로 시상식을 취소했다. 행사가 모두 끝난 자리에서 그는 슬프다고 말했고 나 역시 슬프다 답했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장편소설 『사소한 일』은 한 소녀가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해 집단 강간당하다 총살되는 일이 얼마나 사소한 일로 간주되는지를 덤덤히 보여준다.
필자가 속한 의 편집실에는 매주 전국 각지 대학의 신문이 도착한다. 그중에서도 중대신문은 꼭 읽으려고 하는 신문이다. 평소 우리 신문사 기자들과도 중대신문을 보며 자주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한눈에 확 들어오는 사진과 깔끔한 지면 구성, 매번 신선한 아이템으로 쓰인 기사가 참 마음에 든다. 매주 신문을 발행하는 중대신문 구성원들의 노고 없이는 완성되지 못할 값진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중대신문에서 항상 눈길이 가는 지면은 ‘사회면’이다. 지난 제2053호의 사회면 주제는 ‘여성 노숙인’이었다. 매일 넘쳐나는
대학 언론에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 대학 공동체뿐만 아니라 외부의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독자와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를 감싸고 있는 두 겹의 사회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한 겹은 우리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학생사회요, 다른 한 겹은 대학 밖의 사회이다. 이종(異種)의 두 사회를 조화롭게 담아낸다는 것이 대학 언론의 매력이며 내가 중대신문을 읽는 이유다. 이러한 관점에서 11월 27일 발행된 제2053호는 좋은 사례가 된다. 새로운 1년을 이끌어 갈 학생 대표자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학내
최근 들어 언론의 공공성을 둘러싼 논쟁이 연일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대신문을 펼치면서 대학 언론의 공공성은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다. 제2052호 뷰파인더에 실린 중대신문 기자들이 참여한 취약계층의 겨울나기 돕기 봉사활동 보도는 대학 언론의 공공성을 잘 보여준 기사로 평가된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취업을 걱정해야만 하는 청년들에게 캠퍼스는 더 이상 주변 이웃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돌아보고, 이들의 고단함과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이 중고등학교의 연장선상
바야흐로 디지털이 낳은 폭발적 변화의 시대다. 콘텐츠의 트렌드는 쉽게 바뀌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페이지를 요구하며 새로고침 3초의 시간조차 참지 못한다.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에 관해 배우다 보면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옳은 일인가 자연히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논의 지점으로부터, 김초엽 작가의 2019년 작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제목을 따왔다. 중대신문은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올드 미디어다. 물론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노력도 존재하지만, 1947년부터 꾸준히 캠퍼스 내
종이신문은 마치 지도와 같아서 지면의 면적과 위치로 기사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제2051호 1면 커버스토리는 의대 입학 정원 확대에 관한 것이고, 4면 보도기획에서 그 논의 과정을 시기별로 정리하면서 다른 입장들을 고루 다뤘다. 균형감은 있지만 좀 건조한 것 같은 아쉬움은, ‘뉴스 에필로그’에서 각 입장의 대립지점을 견주면서 그 각축이 국민을 이롭게 하는 결실로 귀결돼야 한다는 보도부장의 일갈로 해소됐다. 이 주제는 보건의료 시스템과 사회보험,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관계, 지역별 보건의료 자원의 불균형, 국민건강의 형평성 등과
고양이, 나는 고양이가 좋다. 그중에서도 단연 길고양이가 좋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면서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길고양이의 삶이 부럽다. 자주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하는 건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6일 발행된 제2050호에는 인권 문화제와 관련된 기사가 1면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읽는 내내 중대신문이 소외된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김지우 기자의 실버존 기사가 인상 깊다. 노인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지금, 그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