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가치’나 ‘인문학적 상상력’과 같은 표현들은 계량적 방식으로 지식을 확보하는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색한 수사(修辭)일 수 있다. 물론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표현 때문에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을 한갓진 ‘유희()학문’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철학이 제시하고 인
‘교양있는 척’이나 ‘교양도 없이’라는 표현을 접하면 교양(敎養)의 ‘과잉’뿐만 아니라 그 ‘결핍’도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아마도 내면적인 성숙함이나 인격의 형성 없이 겉으로만 세련된 행동과 지식을 보여주는 것을, 후자는 인간이 최소한 가져야 할 품위의 결여를 말하는 것 같다. 교양(Bildung)은 ‘도야(陶冶)’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서구 전통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누구도 그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누구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절대적 타자’이다. 그것은 모든 기대를 무산시키는 ‘무뢰한 사실(factum brutum)’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사태인 것처럼 보인다. 죽음 후에 한 개
약 100년 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M. Weber)는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일상(日常)의 일’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묵묵히 자신의 신앙을 추구하는 선량한 다수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일상의 일’에서 ‘일상의 문제’가 된 느낌이다. 종교와 연관된 많은, 대체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연일 매체를 통해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광고들이 눈에 자주 띈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쨌든 행복한 삶을 위한 또 하나의 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뷰티(Beauty)나 에스테틱(Aesthetic)이란 단어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화장(化粧)과 성형외과와 연관된 단어들이 나온다. 에스테틱이라는 표현이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은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다. 다른 모든 일에서도 그렇지만 그의 사랑 이야기는 까다롭고 사람을 힘들게 한다. 이는 아마도 사랑만큼 인간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도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 준다. 사랑에는 육체와 정신의 즐거움과 고통이 교차하며 인간에 대한 헌신
현대는 ‘힐링’의 시대이다. 삶의 질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제 사회 전체를 선도하는 모범적 인간상보다 다양한 형태의 삶의 가능성이 주어지고 각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눈에 띄게 늘어간다. 이를 반영하듯 인생의 멘토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소중한 행복의 길을 담아 세상에 전파하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고유한 체험에,
우리의 시대는 ‘정의로운 시대’는 아니지만 ‘정의의 시대’, 즉 정의가 시대의 화두가 되는 시대이다. 정치와 경제의 제도와 같은 사회시스템이 자기실현과 재화의 분배라는 정의 구현에 결정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구성원 각각의 실천적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역할은 이념적 실천의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에서 실천해야
비판받기를 즐기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 사람을 너그러운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도 다반사이다. 그냥 모나지 않게 두리뭉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판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리스어의 크리네인(Krinein)과 라틴어 크리티쿠스(Criticus)에서 유래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 1637)에서 처음 표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서양 근대철학의 서막을 여는 선언이다. 사실 추론이 아니라 직관이므로 ‘그러므로’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이 발언은 당시 신학 및 종교계의 시선을 벗어나려는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경제학자’로 부르고 심리학을 전공한 교수를 ‘심리학자’로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철학을 전공한 교수를 ‘철학자’로 부르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다. 이 개운치 못한 뒷맛은 철학에 대한 세상의 기대에서 비롯된다. 일단 이러한 기대의 정당함을 제쳐두고 보면 세상은 철학자에게 단순한 학자 이상의 좀 더 고결한 역할을 기대한다.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