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PC통신방에 들어가면 한 일본가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난 그를 너무 사랑했는데, 그가 죽다니 더 이상 살아갈
낙이 없다.” “다들 왜 이러나. 일본 가수 하나 죽은 것 가지구….” 논쟁
의 장본인은 다름아닌 ‘X 저팬’의 전 기타리스트 히데.

그의 자살을 둘러싸고 이미 일본에서는 2명의 10대 청소년이 자살했고, 시
신이 안치된 곳에는 수만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름까지 생소한 ‘X 저팬’이라는 그룹하며, 현재 멤버도 아닌 과거에 활동했
던 기타리스트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 민감한 반응에 낯설어 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에게 ‘X 저팬’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버금가는 인기
그룹이며 그들의 노래를 흥얼대지 못하면 대화의 축에도 낄 수 없는 실정
이다.

이만큼 ‘합법적인 일본대중문화의 개방’이라는 담론이 있기도 전에 일본
문화는 세대별 괴리감을 지닌 채로 한국사회에 유입되었다.

이미 일본문화의 개방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회자된 바 있다. 으슥한 만화방
구석을 채웠던 불법저질 만화의 선정성에서부터 스트리트 파이터의 폭력성에
이르기까지 일본문화의 악영향은 대대로 한국인의 정서에 ‘반감’을 불어
넣었다.

특히 최근 일진회 사건으로 대표되는 무분별한 청소년들의 행동은 대부분
일본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던중 김대중 정부의 문화정책으로 대표되는 ‘일본문화 개방정책’으로
일본문화 유입의 찬반문제가 문화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김
대통령은 지난달 “일본문화를 억지로 막아 놓으니 좋은 것보다는 나쁜 문
화가 들어오고 있는게 현실”이라며 “일본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결코 두
려워할 것이 없다”라는 강력한 개방의지를 비춘 바 있다.

더욱이 지난 13일 문화관광부는 일본대중문화의 개방프로그램을 마련할 ‘한
일교류정책자문위원회’를 발족해 일본문화개방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실
정이다.

지명관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 만화가 이두호씨, 연극배우 손숙씨 등 일본전
문가와 사학자 및 문화예술계 인사 등이 두루 영입된 이번 자문위원회는 개
방의 대상과 시기, 단계 등을 논의해 정부에 정책자문을 하게된다.

문화부는 위원회의 자문결과를 토대로 올해 하반기에 공청회를 개최하는등
각계와 국민여론을 폭넓게 수렴할 계획이다.

이런 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다. 충분한 준비
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오는 고도로 상업화된 일본문화에 한국문화
가 버티기는 역부족이라는 게 중론이다. 더구나 일본문화의 퇴폐적이고 폭
력적인 성격이 이미 확고히 부각된 상태여서 개방의 길은 한층 더 험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현재로선 일본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쪽의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
는 분위기다.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문화평론가 백지숙씨의 글을 살펴보면
수용자 중심의 문화규제만이 그 실효성을 지닐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국산인가? 문화적 다양성과 포괄성을 담아내지 못한
미련하고 무딘 규제는 없는니만 못하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뿐만아니라 국내 유수의 일간지들도 일본문화 개방에 찬성한다는 각종 리서
치 발표나 사설을 통해 대중의 불안을 최소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4월 18일자 중앙일보 사설만 보더라도 “해방후 철저하게 이뤄진 일본문화에
대한 봉쇄조처는 반일감정 문제도 있겠지만 수준의 격차도 무시할 수 없다”
라며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
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미래소년 코난’ ‘캔디’ ‘사파이어 왕자’ 등 20∼30대들의 어린시절 한
켠을 차지했던 만화들. 일본만화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부분 배신감을 맛
보았겠지만 요즘 어리이들은 ‘세일러 문’의 요정들이 일본에서 태어났다
는 사실을 알면서도 TV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일본만화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65%에 달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와 같은 현상
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작년 중앙대 대동제와 올해 4월 연세대 등에서
상영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몰려든 수많은 대학생만 보더라도 문화란
‘규제’라는 형식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80년대 중반 공산권 붕괴이후 특수한 상황에 처한 소수 국가를 제외하고 ‘
문화빗장’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미국
이라는 일인제국이 되어버린 영화계를 주시하며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기에
분주하다. 이런 시점에서 “장벽이 없어지면 관문이라도 제대로 만들자”
는 문화계의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에서 실시하고 있는 방송 쿼터제(TV·라디오 프로그램중 40% 이상은
프랑스 제작물)나 캐나다 국영방송이 황금시간대에 자국 프로그램 편성비
율을 높이고 있는 점등은 미국 문화상품에만 유독 관대한 한국인들에게 시
사하는 바가 크다.

<최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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