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샌가 영화관에 매표창구가 사라져있었다. 웃으며 고객을 맞아주던 매표 직원의 빈자리는 커다란 스크린이 차지하고 있었다. 영화관만이 아니었다. 자주 가는 식당이나 카페, 터미널과 기차역 등에서도 키오스크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기자는 처음 키오스크를 이용해 결제하며 어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누구도 키오스크 조작을 알려주지 않았다. 옆 키오스크에서도 노부부가 이를 조작하는 데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도와줄 직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자가 노부부를 도와줘야만 했다. 하마터면 관객이 돈이 있음에도 표를 구매하지 못해 영화를 보지 못할 뻔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질 뻔했다. 

  키오스크로 인한 어려움은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였다. 최근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에서 디지털 약자들이 키오스크 사용에 불편함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줄지어 올라왔다. 특히 ‘엄마를 울린 키오스크’라는 소셜네트워크상 사연을 바탕으로 한 보도 영상은 디지털 약자들이 느끼는 사회적 소외감이 얼마나 큰지 시사했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키오스크 조작법에 미숙한 엄마가 패스트푸드점에서 20여 분간 주문을 못 한 채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엄마는 이를 사연자에게 고백하며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키오스크로 디지털 격차를 느끼는 사람들은 노인만이 아니었다. 시각장애인도 화면을 확인할 수 없어 디지털 키오스크 주문에 불편함을 겪는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또한 물리적 높이 장벽에 가로막혀 디지털 키오스크 주문을 수월히 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한글로만 이뤄진 키오스크는 외국인이 주문할 때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디지털 격차로 인해 디지털 약자들이 느끼는 소외감을 보고 들으며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이 마냥 좋은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늘 발전된 기술들에 환상을 가져왔다. 기술의 발전은 곧 편리함으로만 다가왔다. 새로운 기술을 잘 습득해야 지식인이라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새로운 기술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우리는 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에 비해 기술을 빠르게 적용하는 것이 모두에게 긍정적인가라는 고민은 하지 않았다. 기술 발전으로 우리 삶이 편리해질수록 누군가에겐 더욱 살아가기 힘든 사회가 될 수 있다. 

  앞만 보고 걷다가 자칫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는 한다. 항상 주위를 잘 둘러보며 걸음 하나하나 신중히 해야 다치지 않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나아가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편리함에만 매몰돼 진보된 기술을 무조건 수용하면 안 된다.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골라야 한다. ‘속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격언이 있다. 조금 늦더라도 괜찮다. 모두가 건강한 사회로 발을 향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나의 편리함이 누군가의 불편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배효열 대학보도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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