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에서는 편견을 감정적, 인지적, 행동적 측면으로 구별하고 감정적 측면을 편견, 인지적 측면을 고정관념, 행동적 측면을 차별이라 일컫기도 한다. 세 측면이 서로 연관돼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공동체의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는 언어는 한마디로 ‘편견’의 언어라 부를 만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지나온 시간이 이러한 편견의 언어를 재확인시켜줬다. 하급자에게 ‘확찐자(‘확진자’를 소리대로 적은 것이나 코로나19로 인해 갑자기 살이 많이 쪘다는 의미로 사용)’라고 말한 어떤 이는 모욕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방역 당국의 ‘깜깜이’ 환자라는 표현은 시각장애인 단체로부터 시정을 요구받고 ‘감염경로 불명’ 환자로 수정되기도 했다. 대상을 모욕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표현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입장은 다르다는 사실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성의 외모를 품평 대상으로 삼거나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 지칭어를 부정적 맥락에서 사용하는 일은 흔하디흔하다. 편견의 언어는 물리적 폭력과 동반되기도 하는 수위 높은 혐오 표현에 비하면 사소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바로 그 이유로 하여 만연해 있기도 하다. 최근에도 한 국회의원은 ‘꿀 먹은 벙어리’라는 말로 상대의 침묵을 비방한바 정치인의 이런 언사 역시 끝 간 데가 없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는 표현은 이뿐만이 아니다. ‘단계적 일상회복’보다 ‘위드 코로나’를, ‘비대면’보다 ‘언택트’를 쓰는 것은 거듭 생각해도 마뜩잖은 일이다. 말글에 관한 한 전문가라 할 어떤 이는 ‘위드 코로나’가 ‘단계적 일상회복’보다 “더 친숙하다”라며 이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이 콩글리시라는 비판에 대해 그는 국어학자답게 “모든 말은 현지화한다”라며 ‘내땅내영(내 땅에서는 내 맘대로 영어 쓰자)’이라 외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마뜩잖은 이유가 단지 콩글리시라서 혹은 일본 기원이라서는 아니다. 적어도 공공언어의 현장에서는 한국 사회의 모든 사람이 외국어를 알고 있으리라고 간주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이는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더 쉽고 더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말을 두고서 굳이 콩글리시나 국적 불명의 조어를 쓰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각종 상점의 무인 판매기나 전자 기기 등의 지시어도 한글로 적기만 한 외국어로 가득하나 이런 언어가 노년층을 차별할 수 있음은 간과된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고들 한다. 연일 막말을 갱신하며 비호감 경쟁 중인 대선 후보들을 두고 편견과 차별의 언어를 운운하자니 이 얼마나 한가한 타령인가 싶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언어로 좋은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무엇보다 그들의 말을 우리 선택의 한 기준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편견’의 언어를 ‘평등’의 언어로 바꿀 힘은 우리에게 있다.

최유숙 교수 다빈치교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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