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비평 부문 당선 : 윤소빈 학생(사회학과 4) 〈영화 《미나리》가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
 

영화 〈미나리〉 스틸 이미지. 사진출처 NAVER 영화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길 시작하면서부터.”

  영화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은 한 소설가가 쓴 이 인용문을 보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영화는 감독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 자전적인 이야기로 잘 알려져있 다. 이 인용문은 이렇듯 영화가 감독의 실제 기억을 다뤘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게 살펴볼 만하지만, 무엇보다 이 문장이 특별한 이유는 ‘기억’의 반의어로 ‘망각’을 배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망각’을 대신하여 ‘기억’의 대립항에 자리하는 것은 ‘경외’다. ‘경외’라는 말은 언뜻 기억과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단어로부터 문장을 사유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통해 영화에 더 정확히 접근해 볼 수 있다.

  먼저, ‘기억은 어떻게 경외가 되는가’이다. 어떤 집단기억이 공통의 노스탤지어로 소환되고 추억될 때, 그 기억은 경외의 대상이 되기 쉽다. 왜냐하면 이때 하나로 특정되는 집단기억은 동질적이라고 상상된 공동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 공동체 안에 포섭되지 못한 주체의 기억은 힘을 잃게 된다. 이는 이 영화가 아시안 이민자라는 다른 주체를 스크린에 제시한 이유이자, ‘아메리칸 드림’으로 표상되는 미국 보편의 정착기나 서부극에 대한 대안적 시선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이런 면에서 ≪미나리≫는 보편사에 대한 경외를 멈추고, 다른 기억으로 과거를 환기하기를 요청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그렇다면 경외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이다. 아시안-아메리칸의 개척 서사를 경유한다는 것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지만, 이처럼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망각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라면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회상하여 재현해내면 되지만, 앞서 언급한 보편사처럼 어떤 역사적 진실은 그것을 왜곡하지 않고 상기해내더라도 경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억의 방식이다. 특히 이 영화의 탁월성은 기억을 사유하기 위해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이 영화의 기억법을 추적하는 일이며, 이를 위해 들뢰즈의 시간관을 통해 ≪미나리≫의 기억들을 톺아보고자 한다.

  데이비드라는 시점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기억에 대한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된다. 스크린을 기준으로 안팎으로 나뉘는 기억이 그것이다. 영화는 데이비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관찰되는 스크린 내부의 기억과, 관객이 주체가 되는 스크린 외부의 기억에 접근하고자 한다. 전자의 경우 영화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인물별·시간대별 기억을 통해서 데이비드가 현재적으로 구성해가는 기억이다. 후자의 경우는, 오늘날 영화를 시청하는 관객이 이미 어떤 지배적 의미를 부여 하고 있는 과거의 기억에 대해 다시 사유하기를 요청하는 메타-기억이다.

  이 영화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텍스트 안에서 전개되는 데이비드의 기억이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카메라의 시선이 각각의 사연을 두루 쫓고 있지만, 유독 데이비드의 시점 쇼트(point of view)가 반복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데이비드 가족이 아칸소로 이사가는 길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특히 첫 장면에서 데이비드는 선두에서 이사 트럭을 모는 아버지 제이콥과 그 뒤로 승용차를 운전하는 어머니 모니카, 조수석에 타고 있는 누나 앤을 가장 뒷좌석에서 관망하는 동시에 창밖의 풍광을 응시하는 시선의 주체이다. 이처럼 영화는 첫 시작부터 데이비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주요 인물의 사연과 세계관이 드러나는 중요한 시퀀스들은 데이비드의 시점쇼트를 통하여 포착된다. 그만큼 영화는 데이비드의 가치관과 성장기에 주목하고 있으며, 관객이 이 인물과 동일시 하여 텍스트를 읽어내도록 유도한다.

  또한, 서사적 공백이 많은 이 이야기에서, 데이비드의 세계관과 심리상태를 추측할 수 있는 조건들은 유독 상세하게 설명되기도 한다. 가령, 수평아리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제이콥의 가르침으로 쓸모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을 학습한 것이나, 데이비드를 향한 부모의 첫 대사가 공통적으로 ‘뛰지마’라는 것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금욕적 태도를 일상적으로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그를 ‘너무나 한국인’이라고 설명하는 모니카나, 한국인이라면 머리를 써야 한다고 말하는 제이콥 때문에 통합적인 국가 정 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도 드러난다.

  데이비드는 그에게 지워지는 각종 억압과 어른들의 상충하는 가치관으로 인해서 영화에서 가장 분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가 겪고 있는 야뇨증이다. 데이비드의 과제가 무의식에서 드러나는 이 억압과 분열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줌’과, 그에 대비되는 ‘한약’이라는 메타포는 중요하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데이비드가 마치 오줌을 싸듯이 선 채로 낮은 테이블 위의 컵에 마운틴듀를 따르는 장면과, 그 뒤에 이어지는 어른들이 한약을 달이는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데이비드를 중심에 두고 한약을 짜는 순자와 모니카, 그리고 제이콥이 그를 둘러싼 일종의 삼각 구도로 프 레임에 담긴다. 오줌이 분열의 증거이고 한약이 그에 대비되는 것이라면, 이는 데이비드가 이 인물들 때문에 분열을 겪지만 다시금 이들 덕분에 잘 헤쳐나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화가 인물별·시대별 기억들을 데이비드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데이비드가 분열적인 자기 정체성에 대응하는 성장방식이기 때문이다. 선술하자면, 데이비드는 이 기억들 을 통해서,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하는 주체로 남기를 선택하며 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종합’과 기억
  들뢰즈에 따르면, ‘시간’은 과거의 개별 경험들에 대한 압축작용을 통해 그 개별성과는 다른 새로운 일반성으로서 차이를 생산해낸다. 이러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이 우리가 체험하는 ‘살아 있는 현재’이다. 그는 또한,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을 ‘순수과거(기억)의 종합’으로 정의한다. 이때 핵심은 과거가 현재와 동시적으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가 지나감으로써 과거가 만들어진다는 시간에 대한 통념과 구분된다. ‘새로운 현재’가 도래하면, ‘예전 현재’가 영원히 존재하는 과거인 ‘순수 과거’로 밀려나서 압축된 상태로 현재와 공존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도래하는 현재란, 압축된 순수 과거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때 반복되는 대상은 자기동일성이 결여된 ‘차이 자체’이므로, 기억을 원본 그대로 ‘상기’해내는 플라톤식의 재현과는 구분된다.

  이러한 들뢰즈의 시간 개념으로 기억을 정의하면, 기억이란 영원히 존재하는 과거이자 현재와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과거이다. 들뢰즈의 틀로 영화를 볼 때, 데이비드의 삶의 경험은 계속해서 순수 과거로 압축되어 데이비드의 현재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데이비드는 어린아이로 등장한다. 따라서 그는 아칸소 이전의 기억을 자원 삼아 영화 속 현재를 정체화하기도 하겠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아칸소에서 겪어나가는 삶을 통해서 매우 역동적으로 기억을 구성해나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데이비드가 아칸소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기억하는지가 그의 삶에 매우 중요하게 관여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아칸소에서 데이비드의 시간은 주변 인물과, 그 인물들의 기억을 응시함으로써 종합된다. 이때 순자와 폴, 제이콥과 모니카, 데이비드와 앤은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인물 (세대)이지만 단순히 시대의 대변자로만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데이비드의 시선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 모든 시제를 동시적이고 중첩적으로 경험하는 인물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각 다른 시간대의 과거를 경험했지만, 그 과거를 압축하여 과거와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인물들이며, 그렇게 각 인물 안에서 종합된 시간은 아칸소라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서로 교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이비드의 시간이란, 기본적으로 주변 인물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종합되지만, 동시에 다른 인물들에서 각각 종합된 시간을 자신의 순수과거로 압축해냄으로써 구성되는 현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데이비드는 기억하는 주체인 동시에, 타인의 ‘기억들’을 기억하는 주체가 된다.

  차이와 반복의 기억‘들’
  데이비드가 포착하게 되는 등장인물들의 차이는 세속과 종교라는 틀로 접근할 때 효과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틀은 등장인물을 분류하는 기준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이 세속과 종교의 이분법으로 양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병에 걸린 순자가 허공을 보며 ‘방공호로 숨어’라는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과, 폴이 참전 당시 가져온 한국 지폐를 꺼내는 장면은, 인종이 다른 이들이 한국전쟁이라는 같은 시간대를 건너온 존재임을 보여준다. 또한, 모니카와 제이콥의 갈등이 폭발하는 대화에서는 이 부부가 한국과 캘리포니아에서 힘든 시간을 함께 겪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하지만 아마 이들은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겪어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과거가 응축된 현재에 나타나는 가치관은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순자는 ‘재밌고 좋다, 재밌으면 됐다’는 말을 달고 살며 직관과 감정을 따르는 쾌락주의자이고, 유일한 피붙이인 모니카에게는 선뜻 두툼한 현금 봉투를 내어주지만 교회에 낸 헌금은 도로 집어오는 무신론자이다. 반면, 폴은 신과 미신을 두루 믿는 독특한 방식으로 믿음을 가꾸어나가는 인물이다. 그는 수맥법과 엑소시즘을 믿는 기독교인이며, 탁아소나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마을교회를 다니기보다 주일마다 직접 십자가를 짊어지며 고행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실천한다. 한편, 제이콥은 순자처럼 세속적인 인물이지만, 쾌락보다는

  실용의 가치를 우선하며 농장 경영으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순자와 다르다. 또한, 모니카는 일상적으로 기도하는 종교적 인물에 가깝지만, 그 기도는 신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데이비드의 완치에 대한 소망에서 촉발된 매우 세속적인 기도이다. 그래서 데이비드에게도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녀가 교회를 찾는 것 역시 커뮤니티에 소속되기 위한 세속적 목적에서 연유한다.

  이렇듯 네 인물은 세속과 종교를 횡단한다. 비슷한 일을 겪었더라도 그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또한 매우 다르다. 그래서 응축된 기억은 현재에서 반복되지만, 그 반복은 자기동일성, 혹은 타인과의 동일성을 형성하지 않는 ‘차이’의 반복이다. 이들은 같은 시간을 살았거나 살고 있고, 같은 언어를 쓰거나 동일한 사건을 경험한 ‘우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개별화, 파편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라는 범주로 묶일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인물들은 또한, 고유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한다. 그리하여 차이는 비관의 근거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이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모니카가 마치 세례 하듯이 제이콥의 머리를 감겨줄 때, 폴이 순자의 완치를 바라며 퇴마의식을 행할 때, 농장 일로 힘들어하는 제이콥을 폴이 가장 가까이에서 위로할 때가 그 예다. 이렇듯 영화 속에 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들은 동일성이 안정감을 보장하고 차이가 갈등을 가져온다는 보편적 명제를 경험적으로 비판한다. 영화는 차이 안에서도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고,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분열을 긍정하는 성장
  데이비드의 시선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순자를 향한 시선이다. 막 미국에 도착한 순자에 대한 데이비드의 첫인상은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후 순자와 여러 사건을 겪으며 유대를 쌓아가지만, 뇌졸중에 걸린 순자를 향해 ‘(제이콥과 모니카의 관계가 틀어진 건) 다 할머니 때문’이라며 여전히 심술을 부린다. 하지만 순자가 불을 내서 가장 쓸모없어진 순간에, 데이비드는 할머니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애정과 사랑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체험한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그를 가족으로 수용한다. 나아가, 순자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냈던 폴에 대한 감정도 변화한다. 초반에 폴과 눈을 마주치지도, 선물을 받고도 감사 인사를 하지도 않았던 데이비드는 점점 자신의 일상 안에 들어오게 되는 폴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예컨대 영화의 중반에 십자가를 지고 교회 버스 옆을 지나가는 폴을 발견한 데이비드의 얼굴에는 거부감이 아닌 반가움이 떠오르고, 폴을 무시하는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는 그런 몰이해에 대한 반발심이 겹쳐진다. 데이비드는 순자와 폴의 다양한 면면을 목격하면서, 더이상 편협한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영화는 미나리라는 상징을 통해서, 대상(등장인물)에 대한 데이비드의 감정의 변화가 자기인 식의 변화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데이비드는 여러 인물과 그들의 기억을 경유함으로써, 그와 관계 맺는 여러 대상의 통합되지 않는 개별성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런 대상 간 차이로부터, 자신의 다중적인 정체성이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데이비드가 더는 이불에 오줌을 싸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물론 영화는 데이비드의 변화를 감정과 은유를 통해서 좇고 있고 그의 성장을 비선형적인 것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의식적 차원에서 명쾌하게 해명되지는 않는다. 또한, 자기인식의 변화는 어쩌면 결말 이후에 지속될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아야만 제대로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로 은유 되는 미나리는 데이비드의 변화된 자기인식을 방증한다. 이 영화의 결말로 제시되는 미나리는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키지 않고서도 이국의 땅에 잘 뿌리 내리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쓸모와 인간성, 쾌락과 금욕,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분열을 겪지만, 어느 한쪽으로 자아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균형을 찾아간다. 이러한 데이비드의 주체 되기는 들뢰즈의 ‘시간의 세 번째 종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자아의 분열을 확인함으로써 시작되는데, “모든 동일성의 근거인 자아의 자기 동일성을 해체함으로써 모든 동일성을 해체하는, 보편적인 근거와해”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현재와 미래는 더이상 과거에 귀속되지 않고, 과거는 창조적이고 희망적인 미래를 위한 시간이 된다. 단일한 속성으로 채워지지 않는 데이비드의 자아를 미나리라는 희망의 키 워드로 읽어낼 수 있는 이유다.

  공백과 무의식
  이렇듯 데이비드의 성장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스크린 내부의 기억만큼이나, 스크린 밖에서 환기되는 관객의 기억 또한 중요하다. 앞서 이 영화가 스크린 내부와 외부의 두 가지 기억을 요청한다고 했을 때, 이 두 가지를 효과적으로 연결해내는 것이 연출적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해법은 이 두 가지 기억의 매개로서 공백과 무의식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연출적 특징 중 하나는 몇몇 상징과 서사가 비어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상징이 특정한 틀로 규명되지 않도록 비워두고, 각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사연의 내용을 흐리게 처리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빛’이라는 상징은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창문을 통해 데이비드의 방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나, 순자와 데이비드가 한 이불에서 동침한 날의 눈부신 햇빛, 아칸소의 밤을 밝히는 조명과 달빛 등 빛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의미가 모호하다. 등장인물의 감정이나 관계 변화 등을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밝히 기도 했다. 서사적 공백도 큰 특징이다. 제이콥과 모니카가 왜 한국과 캘리포니아를 떠나왔는지 구체적인 사정이 제시되지 않고, 폴이 마을에서 이방인처럼 겉돌게 된 이유도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화재 이후 부부가 왜 계속 아칸소에 남을 것처럼 수맥을 찾는지, 순자는 명을 달리한 것인지 등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영화에서 어떤 상징과 서사는 처음부터 공백으로 설정된다. 그런데 어떤 기호는 다른 의미로 채워짐으로써 궁극적으로 비워지기를 목적한다. 광활한 평야의 이미지, 데이비드가 신고 다니는 카우보이 부츠, 교회 친구의 카우보이모자 따위의 표상들이 그렇다. 과거 서부극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이 기호들은 공통적으로 강인한 백인 남성 주체를 함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기호의 이러한 지배적 맥락은 유효하지 않다. 광활한 평야는 생존을 위해 동양의 작물을 기르는 이민자의 일터가 되고, 카우보이모자는 어른의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장난감으로 활용되며, 카우보이 부츠 또한 한국인 이민자가 그만의 특수한 방식으로 아칸소에 정착한 이야기를 통해야 설명되는 기호이다. 이렇게 새로운 특수성으로 채워진 어떤 기호들은 기존의 의미를 낯설게 하며, 기호의 정형성을 비워낸다.

  나아가, 무의식을 자극하는 시청각적 연출도 돋보인다. 예컨대, 데이비드가 순자에게 오줌을 먹인 후 수풀 속으로 달려갈 때, 영화는 풍경과 사운드를 통해서 언어나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데이비드의 세계를 포착한다. 숭고한 분위기의 배경음악이 흐르고, 장엄한 자연풍광이

  카메라의 시선에 담기며, 데이비드의 심장박동을 표현하는 사운드가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이 장면은 관객에게 마치 데이비드의 무의식을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짧은 기억의 조각들이 대사 없이 이어지는 시퀀스에서도 비슷한 연출이 반복된다. 아이들이 모니카가 만든 그네를 타는 장면, 경운기를 모는 제이콥을 뒤따르는 장면 등 기억의 파편들은 주술적인 배경음악,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제시된다. 그래서 이 시퀀스는 지나간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회상하는 외부인을 전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밖 시간의 종합
  그렇다면 이러한 연출적 특징들이 스크린 외부의 기억, 관객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영화는 공백을 통해 관객 개개인이 자신의 기억을 환기할 자리를 마련하고, 기호의 지배적 의미를 상대화함으로써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것을 새롭게 기억할 수 있게 유도하며, 무의식을 자극하여 관객이 기억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 영화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서 관객이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을 새롭게 기억하는 체험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만든다.

  기본적으로 공백은 기억능력의 한계로 발생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관객의 자율성이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영화의 공백은 미완이나 결함이 아닌, 관객을 향한 상호 텍스트성의 요구라고 봐야 한다. 공백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관객 개개인의 기억이며, 그래서 이 영화의 후기는 유독 분열적이다. 상징과 서사의 공백 속에서 앤처럼 맞벌이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을 챙겨야 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이도 있고,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를 떠올리거나, 살아남기 위해 분투했던 냉혹한 이민의 기억을 불러내는 관객도 있다. 이렇게 개인의 기억을 환기하는 공백이 있는 반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공백도 있다. 지배적 맥락이 비워진 기호의 자리가 그것이다. 이는 과거에 고정되어 있던 기호의 의미를, 현재 시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새롭게 기억할 단초를 마련한다. 나아가, 영화가 관객에게 기억이라는 무형의 체험을 유도하는 방식은 관객의 무의식을 불러내는 것이다. 영화는 무의식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음악과 풍광 등 영화적 장치를 통해 관객이 의식의 세계를 벗어나 기억이 머무는 무의식에 직접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이러한 연출적 특징들은 관객이 어떻게 이렇게 특수한 소재의 서사를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무리 없이 불러낼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이에 따라 관객은 데이비드의 시점쇼트를 따라가지만 관객마다 고유한 기억으로 시간을 종합해내면서 저마다 의 방식으로 그의 성장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나가며
  앞서 데이비드는 인물들의 과거가 현재화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하고, 반복되는 기억이란 차이‘들’에 다름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또한, 이 영화는 영화의 내용이 특정한 방향으로 완성되거나 통합적인 관객성이 형성되는 것을 지양하고자 공백을 활용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데이비드의 성장기이지만, 기억을 미래를 위한 시간으로 종합해내는 사람은 데이비드만이 아니다. 관객도 기억을 새롭게 기억해낸다. 그래서 기억함으로써 성장하는 주체의 자리 또한 특정되지 않고 비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비어있는 자리로부터 차이들이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길 시작하면서부터.”  이 문장은 이 영화의 기원이면서, 영화의 결말로부터 다시금 시작되어야 할 문장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어떤 차이는 수직적으로 위계 지어지고, 여전히 특정 인종이나 국가의 집단기 억은 지배적 맥락을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이 시대의 기억을 새롭게 기억해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이 영화가 요청하고 있는 기억법을 통해서, 오늘날의 기억을 미래를 위한 시간으로 뻗어내는 것은 이제 영화관을 나선 우리의 몫이다.



영상비평 당선자 윤소빈 학생 Interview : 기억으로 <미나리>를 기억하다

영화 <미나리>는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수상으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빛나는 트로피 이상의 찬연한 성취로 가득한 <미나리>. 이 가치에 주목한 윤소빈 학생(사회학과 4)의 글이 영상비평 부문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기억’을 열쇠로 풀어낸 <미나리>에 대해 윤소빈 학생과 함께 이야기 나눠봤다.

  -당선 소식을 듣고 어땠나? 당선 소감이 궁금하다.

  “얼떨떨해서 당선 여부를 되물었던 기억이 나요. 수상까지는 못하더라도 졸업 전에 1번은 출품하는 것이 저만의 작은 목표였죠. 그런데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듣게 돼 더없이 기쁘네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가능성을 눈여겨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미나리>를 관람하고 비평문을 쓰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한예리 배우를 좋아해서 영화를 보게 됐어요. 보고 나서는 1번 보고 말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영화관에서 작품을 다섯 차례 봤답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비평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죠. 영화를 여러 번 본 것이 키워드를 잡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영화 관람과 비평을 평소에도 자주 하나.

  “영화도 즐겨 보는 편이지만 대중문화에 두루 관심이 많고 서사를 좋아해요. 영화비평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짧은 인상비평은 종종 써왔지만, 이렇게 긴 호흡으로 본격적인 비평을 쓴 것은 처음이랍니다.”

  -비평할 때 지키는 철칙이 있는지 알고 싶다.

  “초심자로서 어떤 철칙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요. 그래도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면, 이론을 위해 텍스트를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반대로, 텍스트를 위해서 이론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은 아닐까 점검하기도 했죠.”

  -<미나리>가 다루고 있는 기억을 스크린 내부와 외부로 나눠 비평했다.

  “저는 영화를 예술 장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 콘텐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영화를 생각할 때 항상 작품과 관련된 사회적 맥락이나 수용자 분석을 포함하게 되죠. 어떤 사람들이 왜 이 영화를 봤고, 어떤 감상을 받았는지가 궁금해요. 스크린 내부 비평에 한정하지 않고 관객성 분석으로까지 확장한 것도 이런 제 평소 관심사가 반영된 것 같아요.”

  -들뢰즈의 시간관을 통해 <미나리> 속 기억의 방식을 분석했다.

  “들뢰즈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탐독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들뢰즈의 이론을 동원한 비평도 적지 않게 봤죠. 그래서 영화와 이론을 연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미나리>에서 감명 깊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데이비드가 회초리 대신 강아지풀을 가져오는 장면을 특히 좋아해요. 아이의 순수함과 어른들의 갈등, 권위적인 분위기 같은 것들을 대조하는 연출이 세련됐다고 느꼈죠. 그 시대의 가족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면서도 가부장적인 양육방식을 옹호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센스 있게 비판하는 연출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끼는 작품에 대해 쓴 글인 만큼, 개인적으로 이 글에 애착이 크지만 그만큼 아쉽기도 해요. 마감에 쫓기며 제출 직전까지 쓰느라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부족한 점보다 잘한 점을 높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앞서네요. 과분한 평가라고 생각하지만, 응원의 의미로 받고 정진하겠습니다.”



심사평

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 : 영화에 대한 진지하고 참신한 시선


영상비평의 투고작들 중 본선에 오른 작품은 1편이었다. <영화 ≪미나리≫가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것인데 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본 결과 왜 이 작품이 본선에 올라올 수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영화 평론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과 공감을 건네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영화 평론은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고 해서, 또는 영화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잘 쓰여지는 것만은 아니다. 좋은 평론은 영화 텍스트와 관객들, 그리고 평론을 읽는 독자들에게 지적이고 정서적인 자극을 줌과 동시에 영화에 대한 입체적이고 풍요로운 해석을 도와줄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본선에 오른 평론은 영화를 깊이 있게 해석함과 동시에 상투적이지 않은 시각에서 출발한 글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평론은 영화 <미나리>를 통해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으며 이러한 영화적 문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일관성 있고 설득력이 있게 진술하였다. 영화의 시점 문제를 중심으로 이러한 주제를 풀어나간 것도 참신했다. 영화 텍스트 속에 완전히 동일시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 텍스트 외부에서 겉돌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의 균형 감각이 발견되었다. 특히 들뢰즈의 철학을 너무 과장해서 내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차분하고 안정된 글쓰기 실력을 보여준 것은 장점이었다. 들뢰즈의 저서를 직접 읽고 참조하지 않은 것은 좀 아쉬운 지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을 잘 소화하고 이해한 상태에서 영화에 적용한 것은 무리가 없었다. 문장에 대한 감각도 비교적 세련되었고 안정감이 보여 이 평론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좋은 평론가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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