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해방 직후에 우리 중앙대에 강사로 오셨던 어느 분의 이야기다.

  그는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사서오경을 떼고 전국의 수재들이 입학하는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미국 유학을 간 것은 지난 1927년이었다. 미국 유학생이 아주 드문 시절에 그는 우스터대 학부를 수석 졸업하고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그를 초빙하려는 대학이 많았지만 그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기로 약속한 함흥의 영생여고보로 복귀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였고 가르친 것은 그 언어에 담긴 민족의 정신과 세계의 문화였다. 그러나 일제 침략자들은 조선의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과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지난 1938년이었다. 벼랑 끝에 선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작가와 시인들이 일본어로 된 문예지를 창간하고, 천황과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작품을 발표하며 가장 앞장서 모국어를 배신했다. 한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 중에서도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의 주구가 되는 변절자들이 줄을 이었다.

  더는 조선어 교육이 불가능하고, 해방은 요원한 상황에서 그에게도 타협과 변절의 유혹이 뻗쳐왔다. 그러나 그는 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편찬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그와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첫 번째 희생자는 그였다.

  그가 가르친 여고생의 일기장을 털어 그가 한글과 민족교육을 한 정황을 찾아낸 일제 경찰은 그를 필두로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줄줄이 체포, 고문, 투옥하고 한글포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아무도 투항하지 않고 해방이 되던 날까지 감옥에서 견디며 싸웠다. 지난 1942년에서 1945년까지 이어진 이들의 투쟁은 항일무장 투쟁의 최정점인 봉오동-청산리전투에 비견되는 항일문화 투쟁의 최정점이었다.

  해방되고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1세대 미국 유학생으로 4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에게는 명예와 권력을 누릴 기회가 잇달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대학의 교수초빙마저도 거절하고 못다 만든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하는 일에 몰두하며 일제강점기 동안 연구와 교육의 대가 끊어진 한글을 되살리려 동분서주했다. 밤새워가며 사전 편찬 일을 도맡고 국어교육 인력의 양성을 위한 연수 교육에는 원근을 마다치 않고 달려갔다. 그렇게 그를 강사로 초빙한 학교 중의 하나가 우리 학교다.

  그의 이름은 정태진이다. 그를 강사로 모셨던 우리 중앙대의 정신, 그에게 배울 수 있었던 우리 동문이 누린 행운을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대학 100년사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이름이 강사 정태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려야 할 것이 수십 년의 재직 기간이나 교수라는 직함, 여기저기 걸려 있는 보직자의 사진은 아닐 것이다.

 

방현석 문예창작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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